01









 프롤로그







딱딱한 돌바닥은 제대로 마감이 되어 있지 않았다. 아직 10월도 되지 않았는데 얇은 치맛자락 너머 느껴지는 돌바닥의 냉기는 생각보다 더 차갑게 엉덩이를 파고든다.







 주름진 눈꺼풀이 힘겹게 열리고 그새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카락 사이로 어제와 똑같은 풍경을 바라본다. 좁고, 어둡고, 차갑고, 비참한 곳. 겨우 몸 하나 놓일 만큼 좁은 공간에는 요강 하나와 약간의 볏짚이 구석에 놓여 있었다.







 손바닥만 한 창문에도 철창이 둘려 있었다. 어디로도 도망가지 못할 감옥 안은 이미 작은 지옥이었다.







 "후후후…."







 낮게 쉬어버린 웃음소리가 잇새로 흘렀다.







 이 감옥에 온 지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의붓딸이 빌어먹을 유리구두에 꼭 맞게 발을 들이민 그 순간부터, 그녀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이렇게 비참한 말로를 상상했던 건 아니지만 상상이라고 해도 그다지 크게 다를 건 없는 것 같다.







 "하아…."







 주름진 입술 사이로 회한이 서린 한숨이 슬금슬금 배어나왔다.







 어머니의 한숨을 들었는지 조용하던 복도에 다시 나지막한 흐느낌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둘째딸, 아나스타샤일 것이다. 의붓딸의 결혼식 이후로 얼굴도 마주치지 못했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말 한 마디 나눌 수 없는 것은 딸들의 혀가 잘렸기 때문일 것이다.







 미안하구나, 딸들아. 이제 엄마는 너희들을 돌봐줄 수 없어.







 나지막하게 울부짖는 딸들에게 마음속으로나마 대답하면서도 그녀는 왠지 이 비참한 현실이 후련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드디어 내일이면 끝이 난다.







 왕자비의 의붓어머니, 희대의 악녀, 어리고 불쌍한 소녀를 학대한 악랄한 계모, 마담 트리메인. 그녀는 내일 사형장의 이슬로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후후후…."







 다시 그녀가 웃었다. 작은 창 사이로, 솟아오른 보름달의 창백한 달빛이 새어들었다.







마담 트리메인







맨 처음에, 그녀의 이름은 우르슬라였다.







 왕국의 시골에서 태어난 주정뱅이 소작농의 딸이었지만 소녀는 그 나이 또래 소녀들처럼 좋은 집안에 시집가기를 바라기보단 공부를 하고 싶어 했다.







 12살 때 영주의 집에 소작료를 내러 갔다가 영주의 아들이 공부하는 것을 우연히 훔쳐보게 된 이후로, 소작료를 내러 가는 것은 우르슬라의 몫이 되었다. 조금 열린 방문 너머로 들려오는 가정교사의 시 낭송이나 알파벳 노래들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어느 날 소작료를 내러 갔던 우르슬라는 평소처럼 수업을 엿보러 갔다가 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영주의 아들에게 팔을 잡혔다. 조금 통통하고, 아버지를 닮아 넓적한 얼굴에 순박한 인상이었지만 두꺼운 입술은 욕심스런 미소를 띠고 있었다.







 "너, 이름이 뭐야?"







 "…우르슬라."







 "너, 늘 이곳에서 내가 공부하는 걸 보고 있지?"







 "……."







 우르슬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영주의 아들은 열여덟 살이었고 우르슬라보다 키나 덩치가 훨씬 컸다. 조용히 주위를 살피는 우르슬라의 기민한 회색 눈을 눈치챈 영주의 아들이 씨익 웃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이거 갖고 싶지 않아?"







 영주의 아들이 내민 것은 어린이용 시집이었다. 특히 시를 좋아하던 우르슬라가 눈을 빛내자 영주의 아들은 더욱 목소리를 낮추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이걸 줄게."







 "……."







 "아니면, 아버지께 말할까? 소작농의 딸이 내 수업을 엿듣고 있었다고?"







 우르슬라는 조금 고민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는 영주의 아들이었고 우르슬라는 소작농의 딸이었다. 그가 거래를 제안한다면 하는 게 옳았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보다는 원하는 것과 맞바꾸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영주의 아들은 우르슬라를 저택의 빈 방으로 데려갔고, 약 한 시간 후 우르슬라는 품에 얇은 시집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소녀는 울지 않았다. 그날 밤 모두가 자고 있을 때 조용히 다리 사이를 씻어내며 입술을 깨물었을 뿐이었다.







 그날부터 우르슬라는 영주의 아들이 원하면 언제 어디서든 옷을 벗었다. 끔찍한 시간이었지만 그것은 때로 책으로, 과자로, 펜이나 종이로 바뀌었다.







 어느 날 열여덟 살의 우르슬라는 생리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고, 아버지에게 머리채를 잡힌 채 영주의 저택으로 끌려갔다. 늘 술에 취해 있는 우르슬라의 아버지는 영주의 아들에게 우르슬라를 내던졌고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던 영주는 그녀의 아버지에게 얼마간의 돈을 쥐어주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결혼식도, 꽃도, 반지도, 심지어 사랑조차 없이 우르슬라는 영주의 아들에게 시집을 갔고 그녀는 마담 셰르도가 되었다. 결혼 후에도 그녀의 삶은 변한 것이 없었다. 아침이면 물을 길어 빨래를 하고 하인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한 후 영주 가족의 식사를 준비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밤마다 침대 안으로 기어드는 영주의 아들을 상대해야 하는 것뿐. 임신한 상태에서도 마담 셰르도는 선택권이 없었고 첫 딸을 출산했을 때도 그녀에게 주어지는 것은 차가운 물 한 잔이 전부였다.







 둘째딸을 낳은 후 그녀는 곧 세 번째 임신을 했다. 유난스런 입덧 덕에 그녀는 비쩍 말라갔고 결국 임신 8개월 만에 사산을 했다. 아이는 남자아이였고, 그때의 경험으로 그녀는 더 이상 임신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죽은 아이를 묻을 때에야 그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쓸쓸한 작은 무덤 앞에서 조금 울었다.







 그 즈음 영주의 아들도 마담 셰르도가 질렸던 것 같다. 겨우 50 클로네가 든 지갑과 함께 그녀는 어느 깊은 밤 영주의 저택에서 쫓겨났다.







 이제 막 스물두 살이 된 어린 처녀가 두 딸을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그녀가 옆 마을의 주점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그녀의 이름은 킥시가 되었다. 잘 웃는 편은 아니었지만 눈치가 빠르고 계산이 정확했기에 주점 사장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했다. 물론 가끔씩 그녀의 이불 속으로 들어간 것도 한몫 했겠지만.







 마담 트리메인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갑자기 흐느낌이 높아졌다. 아나스타샤나 드리젤라의 목소리가 아니라 더 높고 음산한 소리였다. 마담 트리메인은 위화감을 느끼며 마른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해골처럼 뼈마디가 드러난 팔로 조심스럽게 벽을 짚고 작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지만 흐느낌의 출처를 알 수는 없었다. 이렇게 크게 운다면 아마 경비병이 출동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곧 저 울음소리도 그치게 되겠지, 가엾고도 멍청한 여자.







 마담 트리메인의 차가운 회색 눈이 이번에는 둥글게 뜬 달로 향했다. 보름달이 떴지만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해서 묘하게 어두워 보였다.







 킥시였을 때도 이런 하늘을 본 적이 있었다.







 그녀를 거쳐간 남자는 셀 수도 없었다. 아무리 비싼 술을 팔아도 그 돈은 킥시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녀가 남자를 받아들이면 그 돈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었다. 주점 사장은 탐탁지 않아 했지만 그녀가 임신할 염려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별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물일곱 살이 된 킥시에게 그 소문이 들려왔다.







 "귀족인데도?"







 "괴짜라니까."







 "그러니 부인이 도망가지."







 "아니, 도망친 게 아니라 죽였다던데?"







 트리메인 남작에 대한 소문은 킥시가 일하던 주점에도 흘러들었다. 귀족인데도 불구하고 군인으로 지원한 괴짜 남작은 이미 부인이 셋이나 있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었을 때 킥시의 눈이 빛났다. 귀족, 군인, 그리고 홀아비.







 킥시는 모아 두었던 돈을 모두 털어 중매쟁이를 매수하고 새 드레스를 샀다. 트리메인 남작은 30대 후반의 무뚝뚝한 남자였다. 킥시가 공들여 화장하고 드레스를 차려 입고 나타나자 그는 살짝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재빨리 킥시의 몸을 훑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담 트리메인이 되었다.







 트리메인 남작에게는 첫 부인과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다. 밝은 금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아버지를 빼닮은 푸른 눈의 일곱 살 소녀는 마담 트리메인을 처음 보았을 때 아버지의 바지 자락을 잡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마담 트리메인과 그녀의 딸들을 살폈다.







 엘라, 사랑스러운 엘라.







 엘라가 뭘 하든 그건 마담 트리메인의 관심 밖이었다. 그녀는 귀족이라는 이름이 필요했고 자기 딸들이 자신과 같은 인생을 살지 않길 바랐다. 트리메인이라는 이름과 커다란 저택, 그리고 딸들에게 먹일 따뜻한 수프만 있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마담 트리메인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엘라는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트리메인 남작의 품에 안겨 뺨에 키스를 하거나, 음악에 맞춰 아버지와 춤을 추며 웃음을 터뜨렸다. 인형을 늘어놓고 소꿉놀이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엘라는 말 그대로 천사 같았다. 빨간 공을 던지고 받는 놀이를 하다 드리젤라가 맞았을 때도, 아나스타샤가 처음 보는 요리를 조심스럽게 맛볼 때도 엘라는 까르르 웃었다.







 엘라는 선생님 놀이를 가장 좋아했다. 드리젤라와 아나스타샤는 순진한 눈으로 엘라의 재잘대는 붉은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엘라는 가정교사가 자기한테 하는 것처럼 긴 지시봉을 흔들며 마치 세상에서 제일가는 바보 천치를 가르치듯 친절하고 상세하게 수업을 했다.







 "드리젤라 언니, 그 옷에는 이 구두를 신어야 돼. 이 구두를 신으면 훨씬 나아 보일 거야."







 "아나스타샤 언니, 언니는 팔이 짧기 때문에 그런 드레스를 입으면 안 돼."







 "어머나, 언니. 농담하는 거지? 이 정도는 누구나 아는 거야."







 "언니들은 피부가 검어서 건강해 보이네. 난 너무 하얘서 핏줄이 보이잖아."







 엘라는 다정하고 친절했다. 사랑스러운 미소로 언니들의 빈틈을 채워 주었고 마담 트리메인에게도 친근하게 굴었다.







 그러나 마담 트리메인은 그녀의 구김살 없는 미소가 점점 불편해졌다. 원인 모를 불편함에 마담 트리메인이 두통을 앓기 시작했을 무렵, 결정적인 일이 일어났다.







 "아버지, 엘라 혼자 자고 싶지 않아요. 벽장이 너무 무서워요."







 부부 침실에 베개를 끌어안고 나타난 엘라는 마치 파자마를 입은 요정 같았다. 트리메인 남작은 벌떡 일어나 엘라를 안아들더니 소녀의 침실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마담 트리메인은 대수롭지 않게 그날 밤을 넘겼지만 다음날 엘라가 인형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







 엘라는 인형을 양손에 쥐고 서로 키스를 하게 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지만 남자 인형의 머리가 여자 인형의 다리 사이로 들어가는 순간 마담 트리메인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남자 인형의 머리가 여자 인형 사이에서 움직이고, 이번에는 여자 인형의 머리가 남자 인형의 다리 사이로 들어갔다. 더 두고 볼 수 없었던 마담 트리메인이 문을 열고 들어가 엘라의 손에서 인형을 빼앗았다. 엘라가 순진무구한 푸른 눈으로 마담 트리메인을 올려다보는 순간 그녀는 소녀의 눈에서 어린 우르슬라를 본 것 같았다.







 무엇이 나쁜지 모른다. 그러나 모르는 것은 죄악이었다. 나쁜 것이었다. 어린 우르슬라도 그랬다. 영주의 아들이 소녀에게 닿을 때마다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감정은 매번 새롭게 생겨났지만 분출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우르슬라 안에 차곡차곡 가라앉았다.







 이제 그런 감정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엘라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담 트리메인은 토할 것 같았다. 물컵 안의 모래를 휘저은 듯, 가라앉아 있던 혐오감이 순식간에 그녀를 감쌌다. 엘라는 그녀에게 우르슬라를 떠올리게 했다. 작고, 약하고, 외로운 우르슬라.







 어린 우르슬라는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모른다. 그녀는 엘라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담 트리메인은 처음으로 엘라에게 손을 댔다. 영문도 모른 채 뺨을 맞은 엘라가 눈물을 글썽이며 인형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마담 트리메인은 그 작은 손을 매정히 뿌리치고 인형을 벽난로로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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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1 00:55 | 조회 : 640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