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의 연인 5화





 샤워를 끝마친 태석이 젖은 머리카락을 타월로 닦아냈다. 그리고 샤워가운을 꺼내 입었다. 물기를 머금은 그의 얼굴과 몸매는 섹시한 기운이 더욱 넘쳐흘렀다. 가운의 허리끈을 대충 여미고, 욕실 문을 열고 나오던 태석의 시선이 창가로 향했다. 그곳엔 창가에 팔꿈치를 기대어 밖을 바라보고 있는 은수의 옆모습이 보였다. 은은한 조명 아래, 검은 머리카락은 물기에 젖어있었고, 태석과 마찬가지로 욕실 가운을 입고 있었다. 인기척을 들었는지 그녀가 창밖으로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고 나지막이 말했다.



 “왜 이 방에 액자가 없었는지 알 것 같아요.”



 태석이 욕실 문을 닫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왜지?”



 “여기서 본 풍경보다 더 멋진 그림은 없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열린 창문 틈으로 손을 쭉 뻗어보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에펠탑이 눈앞에 반짝이고 있었다. 은수의 객실은 반대쪽에 배치되어있어, 창문 어느 곳에서도 에펠탑을 보지 못했었다. 하지만 이곳은 창문만 열면, 에펠탑이 함께 어우러진 눈부신 센 강의 야경을 바로 마주할 수 있었다.



 별빛을 품은 강가는 고요했고, 에펠탑 언저리의 하늘은 찬란했다. 그 풍경이 너무도 아름다워 은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렇게…… 파리에서의 마지막 밤이 끝났다.



 이 밤이 지나면 다시 숨 막히는 일상으로 돌아가야겠지.



 선선한 밤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가을밤의 향기를 느끼며 은수는 눈을 감았다.



 “…….”



 태석은 여전히 그 자리이다.



 그는 은수의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달빛을 머금은 새하얀 피부.



 물결이 차오르는 검고 영롱한 눈동자.



 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장밋빛 입술.



 본능을 일으키는 여린 실루엣.



 투명한 살결에 반사되는 반짝임…….



 파리의 명작이라 일컫는 에펠탑조차 그녀의 배경이 되어버린 순간이었다. 예쁘고 매력적인 여자는 수없이 봐왔었다. 하지만 이런 느낌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 여자는 없었다. 심장박동이 불규칙해지고, 흐르는 공기조차 멈춰 서게 만드는…….



 태석의 눈빛이 짙어졌다.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녀가 내게 무언가를 바라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아마 나는 모조리 빼앗겼을 거라고.



 그의 시선을 느낀 은수가 고개를 돌렸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방 안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적막으로 뒤덮인 룸 안으로 조금씩 들려오는 밤의 멜로디. 가을바람이 스치는 소리와 낙엽이 부딪치는 소리가 서로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은수는 그를 응시했다. 젖은 머리칼과 짙은 검은색의 눈동자, 샤워 가운 사이로 드러나는 잔근육. 은수의 뺨이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왠지 더 이상 그와 함께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은수는 고개를 돌려 침실 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저는 이만 가볼게요.”



 그녀의 움직임에 태석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다니, 어딜?”



 “할 일도 다 끝났고, 전 이제 제 방에 가서 자야죠.”



 이대로 가버린다고? 지금?



 태석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런 그를 뒤로 한 채, 은수는 문손잡이를 잡으며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거기다 예의 바른 인사말까지…….



 태석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섹스가 끝나자마자, 마치 볼 일은 다 끝났다는 듯이 서둘러 떠나려는 이 여자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태석은 성큼성큼 은수에게 다가가, 문을 열려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의 행동에 은수가 살짝 커진 눈동자로 태석을 올려다보았다.



 블랙홀처럼 깊고 검은 눈동자. 그 뜨거운 눈빛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이대론 못 가.”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 은수가 되물었다.



 “왜요?”



 “같이 밤을 보내자며?”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은수가 말했다.



 “그래서… 같이 보냈잖아요.”



 태석의 깊은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티 없이 맑고 선명한 눈동자, 주홍빛의 촉촉한 입술,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 가운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살결이 가슴을 일렁이게 만들고 그녀를 보내지 못하게 만든다.



 다시 한번 그녀를 안고 싶어졌다.



 그녀의 손목을 잡은 태석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난 한 번만 한다고 한 적 없어.”



 태석의 말에 은수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게 무슨…….”



 은수가 당황할 겨를도 없이 태석이 그녀를 이끌고 다시 침대로 향했다. 강한 팔 힘에 다시 눕혀진 은수. 벌어진 가운 사이로 은근하게 드러나는 그녀의 가슴골이 태석의 본능을 더욱 꿈틀거리게 한다. 지체할 것 없이 태석은 그녀의 위로 몸을 실었다. 팔꿈치와 무릎을 시트에 대며, 자신의 체중이 그녀에게 실리지 않게 몸을 지탱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부드러운 키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머금고, 붉은 입술을 가르며 혀를 집어넣었다. 그의 부드러운 입술과 혀의 감촉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은수다.



 아까도 들었던 생각이지만 이 남자… 정말 키스를 잘한다. 아무 생각이 안들 정도로 정신을 아득하게 만든다.



 은수가 그의 키스에 심취된 사이, 태석은 가운의 허리띠를 풀어냈다. 풀어진 가운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보드라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하아….”



 간지럽고 야릇한 감촉에 은수의 살결이 떨렸다. 그 떨림을 태석은 더욱 강렬하게 만들고 싶었다. 태석이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며 말했다.



 “긴장 풀어. 이번엔 덜 아플 거야.”



 * * *



 “하아….”



 뜨거운 숨결이 침실 안에 가득 차 있다. 은수는 손으로 시트를 부여잡고 흔들리는 몸을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벌써 그와 몇 번째 사랑을 나누었는지 셀 수가 없다. 끝났나 싶으면 다시 키스를 퍼부으며 시동을 걸었고, 한번 시작하면 그칠 줄을 몰랐다.



 원래 남자들은 다 이러는 걸까?



 대체 몇 번을 해야… 욕망이 사그라드는 걸까? 아니면 나와의 섹스가 만족스럽지 못해서 만족감을 얻을 때까지 하는 걸까…?



 하룻밤을 먼저 제안한 건 자신이었다.



 처음부터 그의 방식에 맞춰 섹스하리라 마음먹었었지만, 그땐 이렇게나 오래 할지 몰랐을 때의 이야기였다.



 더 이상은 버티기가 힘든지,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제 그만 해요!”



 그녀의 애틋한 목소리에도 봐주지 않는 그다. 오히려 그녀의 외침이 자극이 되어 몸이 달아오르는 태석이다.



 “아하… 아직이야, 조금만 더….”



 “아… 아항….”



 자신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외설적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런 목소리를 낸 것이 스스로도 창피했는지 은수는 입을 막았다.



 “이제야 좀 좋아졌나 보군.”



 앞으로 더 좋아질 거라는 그의 말이 맞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픔보다 더 강한 쾌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쾌감이 아픔을 넘어선 것이다.



 나로 인해 저 날쌘 눈매가 일그러지는 것이 좋다. 온몸에 땀이 젖어 드는 것도, 탁한 신음을 내뱉는 것도 좋다.



 서로의 몸이 연결된 것처럼 리듬을 맞춘다. 뜨겁게 젖어드는 몸.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며 정신이 혼미해진다. 황홀한 절정감에 취하며 은수가 고개를 젖혀 들었다.



 어른거리는 시야 속에 창문 밖 멀리 파리의 야경이 모습을 비춘다. 멀리 밤하늘을 머금은 에펠탑이 보였다. 까만 도화지에 잔뜩 수놓아진 빛무리들…. 조명과 별빛이 헷갈릴 정도로 영롱하다. 마치 꿈속을 거니는 것처럼 몽롱하게 만드는 빛의 향연.



 이 모든 걸 또다시 보게 될 날이 올까?



 은수의 눈동자가 젖어 들었다.



 이 밤이 끝나는 게… 두려워졌다.



 * * *



 보슬보슬….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바닥이 젖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에 은수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떴다. 또 비가 오나 보다. 파리에 처음 도착한 날도 비가 내렸고, 어제 새벽에도 비가 내렸었다. 다행히 거센 비는 아니었다.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맞아도 괜찮을 만큼의 옅은 가랑비가 내렸다가 멈추기를 반복했었다.



 은수는 살짝 뜬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그토록 반짝이던 에펠탑이 빗속에 묻혀 모습을 감춘다. 희미해진 풍경을 또렷하게 보고 싶어 은수는 눈을 가늘게 떠보기도 했다. 숨바꼭질하듯 에펠탑이 그녀의 시야 안에 또렷해졌다 희미해졌다를 반복했다.



 아른거리는 풍경과 가느다란 빗소리가 너무도 듣기 좋다. 피곤함에 다시 눈을 감으려던 은수가 번쩍 눈을 떴다.



 “……”



 그녀의 시선이 창문 쪽에서 조금 더 오른쪽으로 옮겨졌다. 그곳엔 셔츠 단추를 잠그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바로 어젯밤 자신이 셀 수 없이 안겼던 그 남자였다. 어젯밤의 흐트러진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말끔하게 머리칼을 올리고 세련된 차림을 한 남자만이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깬 것을 눈치챈 태석이 소매 단추를 잠그며 입을 열었다.



 “깼군.”



 그를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상체를 일으키려던 은수가 눈을 찡그렸다.



 “으….”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학창 시절, 가끔 주말에 아버지와 등산을 하고 난 다음 날 아침이 이랬었다. 아니,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몸이 아려왔다. 다리에 힘을 너무 많이 준 것일까. 특히 허벅지 안쪽 부근에 알싸한 통증이 밀려온다.



 어렵사리 몸을 일으킨 은수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물었다.



 “지, 지금 몇 시예요?”



 “여덟 시 안됐어.”



 “벌써 그렇게나….”



 시간을 듣자마자 화들짝 놀라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태석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닌 것 같은데. 평소엔 얼마나 일찍 일어나길래….



 은수에겐 몇 시인지도 모르고 이렇게 죽은 듯이 잔 적이 얼마 만인지 모른다. 강필호와 혼약이 정해진 날부터, 늘 불면증에 시달렸다. 잠을 자도 깊이 잠든 적이 없었고, 겨우 잠들었다 싶으면 날이 밝기도 전에 깨곤 했다. 그런 내가 내 집도 아닌 곳에서, 그것도 처음 만난 남자의 옆에서 이렇게 깊이 잠들다니….



 하긴 어제의 그는 좀처럼 자신을 놓아주질 않았다. 멈출 줄 모르는 섹스에 더 이상은 몸을 못 가누고 기절하다시피 잠들었다. 그렇게 몸을 혹사했으니 쉽게 깨지 못할 법도 했다.



 그가 와인 컬러의 넥타이를 꺼내 목에 걸었다.



 “목욕물 준비되어 있으니 씻고.”



 능숙한 손놀림으로 넥타이의 매듭을 매며 그가 말했다.



 “아침은 식탁 위에 있고, 그 밖에, 필요한 거 있으면 프런트에 연락하면 되고.”



 은수는 자신의 벌거벗은 몸이 훤히 드러나 있는 것을 느끼고 시트를 말아 올려 몸을 가렸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은빛의 손목시계를 바라본 뒤, 태석이 말했다.



 “난 일이 있어서 지금 나가봐야 돼.”



 그의 말에 은수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 그래요? 그럼….”



 순간, 아래쪽에 또 한 번 밀려오는 아릿한 통증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통증을 애써 감추며 그녀가 말했다.



 “저도 지금 나갈게요. 잠시만요.”



 태석은 옷을 입기 위해 나가려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아니야. 여기 있어.”



 “네?”



 “늦어도 오후 1시 전에는 일이 끝날 거야.”



 “…?”



 “바로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대체 왜요? 라는 눈빛으로 은수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네이비 색의 슈트 재킷을 걸치며 말했다.



 “같이 점심 먹지.”



 …같이 점심을?



 지금 나보고 원나잇 상대와 마주 보고 점심을 먹으라고…?



 은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그렇게들 하나? 이런 일이 처음이니 당최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가 아무 말 없자, 태석이 그녀를 짙게 응시하며 대답을 재촉했다.



 “대답은?”



 빠져들 것처럼 깊고 검은 눈동자.



 그 눈을 마주하고선, 도저히 거절의 대답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알겠어요.”



 원하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그가 호텔 룸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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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1 00:27 | 조회 : 357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