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의 연인 3화





 시간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할아버지 때부터 그녀의 집안은 건설업을 했다. 기업명은 <삼양건설>. 2000년대 초반까지 건설 분야에서는 삼양건설을 따라올 기업이 없었다.



 하지만 경쟁 업체였던 SG 건설의 무서운 성장과 함께, 그 외의 수많은 대기업에서 하나둘씩 건설업에 손을 대면서, 삼양 건설의 성장이 주춤하기 시작했다.



 그때 은수의 나이 스물두 살. 그녀는 대학교 수업을 마치기 바쁘게 경영자 수업을 받고, 회사 관리를 도왔다. 그녀의 청춘을 모두 회사에 바쳤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할아버지 때 시절 최고의 기업이라 불렸던 <삼양건설>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1년 전, 최악의 사고가 발생했다. 어렵사리 기업의 건재함을 유지하고 있던 차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여 진행하고 있던 대규모 프로젝트 사업이 공사 중에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인해 기업의 이미지는 완전히 실추되어버렸다. 무너진 건물을 지은 회사에 아무도 일을 맡기려 하지 않았고, 있던 사업마저 사라졌다. 당연히 투자해줄 회사도 없었다. 할아버지 때부터 명성을 이어나갔던 굴지의 기업은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너무도 순식간이었다.



 회사는 빚더미에 쌓였고, 매각 위기에 놓였다. 집은 풍비박산이 났으며, 직원들은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직원들의 밀린 월급은 물론 퇴직금까지 주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아버지와 은수는 어떻게든 회사를 일으키려고 노력했다. 어떻게 키운 회사인데 이렇게 쉽게 무너지게 둘 수는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한 달 전쯤 은수의 아버지는 너무도 솔깃한 제안을 받게 된다.



 바로 경쟁 업체였던 SG 건설에서 혼담이 들어온 것이었다.



 SG 건설의 둘째 아들인 강필호. 그가 원하는 결혼 상대자는 다름 아닌 지은수였다. SG 건설에서 <삼양건설>을 합병함과 동시에 은수를 며느리로 삼겠다는 제안이었다.



 다 무너져가는 기업의 외동딸을 모자랄 것 없는 SG 건설에서 며느리로 삼길 원했던 이유는 바로 은수를 향한 강필호의 탐욕이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은수에게 끊임없이 구애했지만, 그녀는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삼양건설이 위기에 처하자마자 강필호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은수의 아버지에게 혼인을 제안한 것이었다.



 은수의 아버지는 이 혼담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거절해서는 안 되었다. 그것이 그녀의 집안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강필호는 은수가 싫어하는 점을 모두 갖춘 남자였다.



 거만하고, 없는 자를 하대했으며, 탐욕스러웠다. 게다가 강필호의 여자관계가 지저분하다는 것은 재벌가의 자제들 사이에선 익히 소문난 사실. 밤마다 여자들을 바꿔가며 보냈고, 그에게 여자란 돈이면 다 되는 존재였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은수에게 끈질기게 구애를 하고 집착을 했던 건, 아마 온갖 진귀한 명품을 다 바쳐도 함락되지 않았던 유일무이한 여자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은수는 그와의 결혼이 미치도록 싫었다. 피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선택권이 없었다.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만 앞세우기엔, 잃게 될 것이 너무도 컸다. 쓰러져가는 집안과 월급조차 받지 못한 직원들을 앞에 두고, 남자가 싫어서 결혼할 수 없다는 어린 아이의 투정 같은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강필호를 생각하니 역한 기분이 밀려왔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쁜 남자이다. 은수는 넓은 샤워부스에 들어가 물을 틀었다. 거센 물줄기에 몸을 적셨다.



 “쏴아아아--”



 물에 적셔진 머리카락을 넘기며, 얼굴을 문지르듯 씻어냈다. 약혼식까지는 며칠 남지 않았다. 강필호가 약혼식을 생략하고 바로 결혼식을 치르자는 것을 겨우 말렸던 상황인지라, 약혼식이 거행되면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게 분명했다. 그와의 결혼을 생각하니, 미약하게 흔들렸던 마음이 다시 굳건해진다. 오늘 밤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 은수의 눈동자가 의연하게 빛을 냈다.



 일주일 전은 약혼 날을 정하기 위해 모두가 모였던 밤이었다. 강필호의 부모는 은수 집안과 사돈 관계가 되는 것이 아직도 못마땅한지 표정이 썩 좋지 않다. 그러거나 말거나 필호는 약혼식은 생략하고 결혼식을 바로 하면 안 되겠냐며 어린애 같은 투정을 부리고 있다.



 은수는 이어 나오는 코스요리가 좀처럼 입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렇게 음식을 못 삼키는 것을 보면 부모님이 걱정할 것이 분명했다. 억지로 음식을 넘기던 은수는 잠시 화장실을 가겠다며 다급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자마자 변기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먹은 것들을 다 게워냈다.



 “우욱…!”



 병원에선 스트레스성 위염이라고 했던 것 같다. 요 며칠 먹는 것마다 토할 것 같고, 신물이 올라왔다. 강필호의 가족들과 마주 보며 위선의 웃음을 지어야 하는 것이 구역질 나도록 싫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은수가 테라스 쪽으로 가 바람을 쐬었다.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켜니 그나마 좀 살 것 같았다. 그때, 기분 나쁜 걸걸한 목소리가 은수의 귀를 파고들었다.



 “지은수.”



 은수의 표정이 굳어지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앞엔 테라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필호가 마주하고 있었다.



 “지금 가려고 했어요.”



 은수가 테라스 문을 열려 하자, 필호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때? 나랑 약혼을 앞둔 기분이?”



 은수가 대답 없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그가 거세게 그녀의 턱을 붙잡아 들었다.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지금 네가 나한테 고고한 척 굴 때가 아니야.”



 은수가 눈썹이 일그러지며, 그를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더러운 손 치워.”



 그녀의 말에 필호가 코웃음을 치며 입꼬리를 올렸다.



 “하! 내가 더러워? 그럼 너는 얼마나 깨끗해서, 나같이 더러운 놈한테 시집오는데?”



 “……”



 “콧대 높던 지은수도 별거 아니군. 고작 돈 몇 푼에, 그런 다 쓰러져가는 집안을 살리겠다고 팔려오는 꼴이라니.”



 은수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당장에라도 그의 뺨을 휘갈기고 싶은 것을 참고 또 참았다. 분한 마음에 그녀의 가느다란 턱이 떨려왔다. 그 모습이 만족스러운 듯 필호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그녀의 뺨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내가 첫날밤을…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지 모르지?”



 그의 손이 닿는 부분마다 소름이 돋았다. 필호가 그녀의 귓가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거친 숨소리와 함께 나지막이 속삭였다.



 “기대해. 지은수. 내가 매일 밤마다 잠 못 자게 해줄 테니.”



 은수는 또 한 번 아랫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비린 피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꼭 쥔 두 주먹이 부들거렸다. 온몸이 치욕스러워 떨려왔다. 그런 은수의 모습에 필호는 씩 웃으며 테라스 문을 열었다.



 “얼른 들어와. 우리 약혼식 이야기를 마저 마무리해야지.”



 필호는 테라스 밖으로 나가 먼저 다이닝룸으로 들어갔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은수는 테라스에 있던 수풀로 한걸음에 달려갔다.



 “우욱…!”



 화장실로 갈 새도 없이, 은수는 노란색의 물을 토해냈다. 이미 먹은 것을 한번 게워내서, 더 이상 토할 것도 없었다. 쓰디쓴 신물만이 올라왔다. 속이 쓰라리고 목구멍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고통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앞으로 맞이할 고통이 더 참혹했으니까.



 고개 숙인 은수의 눈에 눈물이 고이며 세차게 흔들렸다.



 숨이 막힌다.



 진저리가 난다.



 지금 당장 여길 떠나고 싶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어.



 26년 동안 간직해온 순결을 고작 저런 놈한테 바치는 꼴이라니….



 은수는 무엇보다 그것이 죽어도 싫었다.



 차라리 생판 모르는 놈에게 뺏기는 것이 덜 치욕스러우리라.



 은수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까만 하늘에 수놓아진 별들이 유난히 반짝거리며 빛을 냈다. 문득 은수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파리의 야경을 함께 보러 가겠노라 마음먹었던 일이 떠올랐다. 별빛들을 잔잔히 품은 센 강의 밤 풍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래, 차라리…….”



 밤하늘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무언가 결심한 듯 굳건하게 빛이 났다.



 * * *



 이틀 뒤, 은수는 캐리어에 여벌의 옷과 몇 가지 소지품만 넣은 채,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 삯과 숙박비는 그동안 선물로 받아왔던 가방과 액세서리를 팔아 마련했다.



 유럽을 2박 4일 코스로 오는 나같이 미친 여자도 없겠지. 심지어 첫날과 마지막 날은 비행기에서 보내는 꼴이니 파리에서 주어진 시간은 단 이틀이었다.



 처음엔 센 강의 야경을 보고 오는 것만으로 만족하려 했다. 적어도 그 야경을 보고 있는 동안은 이 지독한 우울함이 사라질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던 그날 밤.



 센 강 다리에서 그 남자를 다시 재회한 순간, 은수는 뭔가에 단단히 홀린 사람처럼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자신과 비슷한 색의 머리칼. 무심한 눈매와 베일 듯이 날카로운 옆모습. 그리고 굳게 다문 입술.



 은수는 알 수 있었다.



 오늘 그가 내 하룻밤의 연인이 되리라는 것을.



 * * *



 태석은 얼음이 든 버킷 안에서 와인 한 병을 꺼내었다. 그가 묶는 객실에는 와인바가 한편에 마련되어 있었다. 와인잔 두 개와 와인병을 들고 소파 테이블로 향하던 태석이 욕실 쪽을 바라보았다. 20분 가까이 샤워하는소리가 멈추지 않고 있었다. 오랜 샤워 시간이 그녀의 망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다고 애가 타거나 초조하진 않았다. 그녀가 별안간 마음이 바뀌었다며 나가겠다고 해도, 순순히 보내줄 생각이었으니까. 그녀를 이곳까지 불러들이는 데 가장 큰 작용을 한 것은 일종의 호기심이었다.



 나에게 반하지도 않았으면서, 나를 유혹한 여자. 태석은 과연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단지 그게 궁금할 뿐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샤워하는 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욕실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태석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설마 쓰러진 건 아니겠지, 술은 안 마신 것 같았는데….



 너무 오랫동안 나오질 않으니 살짝 걱정까지 밀려왔다. 태석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딸칵.



 욕실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에 태석이 다시 소파에 상체를 기대었다. 욕실 문이 아주 천천히 열리면서, 그녀의 모습이 태석의 시야에 들어왔다.



 “……”



 그녀를 본 태석의 한쪽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깔끔한 셔츠 타입의 블라우스에 발목이 살짝 드러나는 회색 팬츠. 은수는 욕실에 들어가기 전의 옷차림 그대로였다. 그러고선 무언가 큰 결심이라도 한 사람처럼 결연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태석이 굳게 다문 입술을 열었다.



 “옷을 입고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의 말에 은수는 살짝 당황한 듯하다가, 욕실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아…. 그럼 다시 벗고 나올게요.”



 “굳이 다시 들어갈 필요 있나? 여기서 벗어.”



 태석의 말에 은수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는 빈 잔에 와인을 따르며 무심하게 말했다.



 “내가 벗겨줘?”



 그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은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 아니요. 제가 벗을게요.”



 은수는 천천히 셔츠 깃으로 손을 가져가 첫 번째 단추부터 하나씩 풀어나갔다. 손가락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손바닥 안은 긴장감으로 적셔져 왔다.



 그녀가 옷을 벗기 시작하자, 태석은 잔에 담긴 와인을 입술에 가져가 천천히 음미했다.



 사르륵….



 고요함 속에 그녀의 옷자락이 손에 스치는 소리와 바닥에 힘없이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굳이 보지 않아도 그녀의 긴장감이 그가 있는 곳까지 느껴졌다.



 저렇게 떠는데 와인부터 한잔 권할 걸 그랬나.



 태석은 따라놓은 나머지 와인 잔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먼저 함께 술을 한잔 마시는 게 낫겠다고 느낀 그가 와인잔을 들며 은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은수를 본 그의 검은 눈동자가 흠칫 흔들렸다. 은수는 어느새 블라우스와 팬츠를 벗어내고, 끈나시를 벗으려던 참이었다. 옷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몸은 새하얗고 가냘팠다. 육감적인 몸매는 아니었지만 선이 고왔다. 마른 체형임에도 불구하고, 골반이 넓고 허벅지와 가슴에는 적당히 살집이 있었다. 가느다란 목선과 움푹 팬 쇄골. 얇은 아이보리색 끈나시 안으로 무늬 없는 상아색의 브래지어가 비쳤다.



 자신의 시선을 눈치챈 그녀의 두 뺨이 빨갛게 올라왔다. 투명할 만큼 새하얀 피부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이 대비되며 묘하게 섹시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끈나시의 끝부분을 잡아 올리며 벗었다.



 여자와 밤을 보낸 게 너무 오래되어서일까. 그녀의 점점 드러나는 속살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몸이 조금씩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끈나시가 상체에서 떨어지면서, 그녀의 매끈한 라인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났다. 속옷만 남은 것이 휑하게 느껴졌는지 그녀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기가 그녀의 모여진 가슴골을 타고 내려갔다.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붉어진 뺨의 그녀가 눈꼬리를 살짝 늘어뜨리며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그렇게 보지 말라는 듯이, 마치 남자 앞에선 처음으로 옷을 벗어보는 여자인 것처럼….



 만약 이것이 연기라면, 정말 교활하고 대단한 여자다.



 그녀가 브래지어 끈을 벗으려다가, 이내 손을 내려놓았다. 선뜻 용기가 안 나는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은수가 떨려오는 손을 다시 들어 올릴 때였다. 그가 테이블 위에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만. 나머진 내가 하지.”



 망설일 시간을 주면 안 되었다. 이제 와서 그만두겠다고 하면 곤란했으니까.



  

1
2018-10-01 00:27 | 조회 : 338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