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의 연인 1화





 “비가 오려나….”



 센 강 주변을 여유롭게 산책하던 은수가 고개를 올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파리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도착했을 때부터 비가 내리더니 오늘도 비가 내렸다가 멈추었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가 온다 해서 꿉꿉하거나 불쾌하진 않았다. 오히려 중간중간 내리는 가느다란 비는 센 강의 운치를 더해주었다. 우산은 챙겨왔으니 걱정될 것은 없었다. 은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센 강 주변을 거닐었다.



 세느 강변 주위에는 프랑스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서 깊은 건축물과 현대에 지어진 다양하고 독특한 건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미묘하게 어울리는 이 풍경들이 은수는 마음에 들었다. 그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눈 안에 담으며 강변을 걷던 은수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누구나 알만한 전통 깊은 호텔 옆에 위치한 카페였다. 지어진 지 오래되어 보였지만 그래서 더욱 고풍스러웠고 테라스를 통해 보이는 실내 디자인도 안락해 보이며 고급스러웠다.



 은수는 재빨리 검은색 가죽 배낭에서 얼굴만 한 크기의 크로키 북과 연필을 꺼내었다. 화가 활동을 하셨던 엄마의 재능을 받아 그림 실력이 없는 편은 아니었다. 은수는 연필을 기울어 잡고 슥슥 러프 스케치를 해나갔다. 새하얀 종이 안에 회색의 옅은 선이 제법 채워질 때쯤이었다.



 “……”



 카페와 종이를 번갈아 오가던 은수의 시선이 한 곳에 멈추었다. 그녀의 시선 끝엔 한 남자가 있었다.



 눈썹을 살짝 가리는 검은 색의 머리칼.



 서양인에게 밀리지 않는 깊은 눈매와 검고 짙은 눈동자. 오뚝 선 콧대와 날렵한 턱선.



 거기에 세련된 느낌의 슈트 핏을 자랑하는 한 남자.



 고급스러운 재질의 슈트와 고가의 명품 시계, 은은한 광택에 슬림한 라인을 가진 짙은 브라운 빛 구두. 카페 안에 있던 종업원들과 손님들은 그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시선을 주고 갔다.



 테라스 쪽에 자리 잡은 그는 다가오는 종업원에게 무언가를 시켰다. 그리곤 검은색 파일을 들고 앉아 문서를 훑기 시작했다. 그 남자가 등장하고 난 후에는 고풍스러움을 자랑했던 카페가 그를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배경으로 전락해버렸다.



 "……"



 은수 역시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마치 자석처럼….



 단지 잘생겼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했다.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온몸에서 넘쳐흐르고 있었다. 은수는 힘이 풀려 놓칠 뻔했던 연필을 다시 쥐었다. 그리고 아까 그렸던 카페테라스 부분에 그의 실루엣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은수의 시선이 그를 훑어 내려갔다.



 얼굴은 작은 편이지만, 어깨는 공유처럼 넓었다. 두상이 예쁘니 어떤 헤어스타일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생김새는 한국 사람으로 보이는데 동양인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비율을 가진 남자다.



 그의 긴 다리까지 슥슥 스케치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그가 전화를 받으며 꼬았던 다리를 다시 내려놓았다. 자세가 바뀌자 미간을 구기는 은수.



 안 돼, 움직이지 마. 거의 다 그려 가는데.



 은수의 사정을 알 리 없는 남자는 전화를 받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뭔가 급해 보이는 그 순간에도 팁을 주려는 모양인지 전화를 받으면서 지갑을 꺼내었다. 그리곤 지폐 몇 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빠른 보폭으로 카페를 나가는 그였다.



 “어?”



 은수는 테이블에 그가 올려놓은 지폐 말고도 지갑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종업원 팁으로 지갑까지 주는 사람은 없겠지?



 그가 실수로 떨어트린 것을 인지한 은수는 크로키 북을 품에 안고 카페로 뛰어갔다. 마침 종업원이 팁을 가져가기 위해 테이블에 도착한 그 순간, 은수가 재빨리 손을 뻗어 지갑을 낚아챘다.



 “이건 저 남자 거예요.”



 은수는 지갑을 들고 그가 사라졌던 곳으로 다시 뛰어갔다. 그는 바로 옆에 위치해 있던 호텔로 들어서고 있었다. 다리가 길어서인지 뛰어가지도 않는데 자신보다 빠른 그가 원망스러웠다. 은수는 그를 쫓아가 호텔 안으로 들어섰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걷고 있는 그에게 소리쳤다.



 “저기요!”



 하지만 뒤도 안 돌아보고 걷는 남자. 여전히 귀에는 핸드폰을 댄 채 직진하고 있었다.



 은수는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른 그의 소맷귀를 붙잡아 당겼다.



 “저기…!”



 그제야 고개를 돌려 은수를 바라보는 남자. 아주 잠시였지만 그의 눈빛이 제 얼굴에 닿는 순간 은수는 숨이 막힐 뻔했다. 위축될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그의 깊은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에 입술이 바짝 탔다. 은수는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지갑을 내밀었다.



 “이거 두고 가셔서….”



 그의 시선이 내려가 진한 갈색의 가죽 지갑으로 향했다.



 “……”



 그가 말을 하지 않자, 무슨 일이 있냐는 듯한 상대방의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울렸다.



 “아, 아닙니다. 잠시 챙길 것이 있어 호텔에 들렀습니다. 지금 바로 미팅 장소로 가죠.”



 남자는 통화를 끝내고 그녀가 건넨 지갑을 받았다.



 “고마워요.”



 은수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남자 목소리까지 근사하다.



 은수는 마치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세기의 작품을 바라보듯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뜨거운 시선을 눈치챈 남자가 아차 싶은 얼굴로 말했다.



 “아, 답례를 해야겠군요.”



 그가 지갑을 열자 은수가 손을 휘휘 저어댔다.



 “괜찮습니다. 사례를 바라고 한 일 아니에요.”



 “받아요. 제 성의니까요.”



 “아니요, 전 정말 괜찮아요.”



 한사코 사례를 거절하는 은수를 지그시 응시하는 남자. 그 시선에 얼굴이 살짝 빨개진 은수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은수는 인사한 후, 뒤돌아서 걸었다. 남자는 점점 빠른 걸음으로 호텔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1층에 멈춰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 * *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밤공기는 선선했다.



 은수는 너무 차갑지도 후덥지근하지도 않은 공기를 가슴 깊숙이 마셨다.



 종일 관광지를 돌아다닌 은수는 호텔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한번 센 강 주변을 산책하기로 했다. 다리를 건너던 은수가 중간지점에서 멈추었다.



 “아….”



 은수는 시선을 내려 잔잔한 강가를 바라보았다.



 밤하늘의 별빛이 그대로 옮겨져 강가를 수놓으며 반짝거렸다.



 어느 곳이 하늘이고 어느 곳이 강인지 모를 만큼.



 “예쁘다.”



 이 아름다운 광경을 혼자 보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이 광경을 볼 날도 오늘 밤이 마지막이라는 것 또한 아쉬웠다. 이 아름다움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 눈에 새기고 또 새기었다. 강가를 바라보는 은수의 눈망울이 젖어 들었다.



 ‘오늘 밤이 지나면 다시 그 지옥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야겠지.’



 흘러가는 시간이 원망스럽다.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아….”



 은수의 입가에서 긴 한숨이 퍼져나갈 때쯤이었다.



 “겁도 없군요.”



 선선한 밤공기 사이로 낮고 굵은 남자의 음성이 은수의 귓가에 닿았다. 쉽게 잊히지 않을 목소리였기에 그 짧은 한마디만으로도 은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은수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납치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은수의 앞엔 그가 서 있었다. 깊고 짙은 검은색 눈동자를 가진, 말쑥한 슈트 차림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그 누가 보아도 근사한 모습을 가진 남자. 은수가 오늘 오전 지갑을 찾아주었던 카페의 그 남자였다.



 은수는 바람결에 빠져나온 검은색 머리칼을 귓바퀴 뒤로 넘기며 그를 응시했다.



 “어떻게 이곳에….”



 “내가 묵는 호텔이 바로 이 근처거든요.”



 “아.”



 남자는 은수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다리 난간에 기대어 섰다.



 “이 밤중에 여자 혼자 돌아다녀도 괜찮을 만큼 치안이 좋은 편이 아닙니다. 이곳은.”



 “제가 그렇게 걱정이 되나요?”



 “주의를 주는 것뿐입니다”



 그게 그거 아닌가.



 은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뚝뚝한 말투에 담긴 다정한 음색. 물론 낮게 울리는 듣기 좋은 목소리 톤에 내 멋대로 다정함을 부여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은수와 나란히 선 남자가 먼발치의 강가를 바라보았다. 은수는 그런 그를 흘깃 바라보았다.



 깊은 눈매와 날카로운 옆선이 달빛에 반사되어 더욱 근사했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저렇게 멋진 얼굴과 우월한 비율을 가진 남자도 삶이 불행하다고 느껴본 적이 있을까.



 그때 남자가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은수는 재빨리 고개를 다시 강가 쪽으로 가져갔다.



 “숙소는 이 근처인가?”



 “?”



 “숙소가 멀면 가는 길에 태워다주죠.”



 은수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남자는 자신의 호의를 거절부터 하고 보는 은수가 영 탐탁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이 늦은 밤 여자 혼자 길거리를 걷든 말든 무시하고 호텔로 들어갔을 것이다. 종일 있었던 회의로 고단해진 몸을 이끌고 낯선 여자를 호텔까지 태워다 줄 일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녀가 자신의 지갑을 찾아준 여자였기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빚을 갚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호의는 여기까지였다. 자신의 제안을 사양하는 그녀의 곁에 더는 얼쩡거릴 이유는 없었다. 남자는 강가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옆선을 한 번 바라본 뒤,



 “그럼.”



 이라는 짧은 인사말과 함께 돌아섰다.



 그녀에게서 몇 발자국 멀어졌을 무렵, 그를 불러 세우는 나지막한 음성.



 “저기요.”



 남자가 다시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은수의 눈동자엔 대담함과 망설임이 뒤섞여있었다. 그녀는 곱게 모은 손끝을 만지작거리더니, 힘겹게 입술을 떼어냈다.



 “저한테 사례를 하고 싶다고 하셨죠?”



 “그래요.”



 “그거 아직도 유효하나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부탁이든 가능한가요?”



 “전 재산을 달라는 말만 아니면.”



 “돈은 필요 없어요.”



 “그럼?”



 남자가 대답을 기다리며 그녀를 응시했다. 가까이서 마주한 그의 눈매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고 짙었다. 은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가, 그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오늘 저와 하룻밤을 함께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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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1 00:27 | 조회 : 280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