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네트의 어머니는 성녀였다. 아니, 지금 와서는 신도라고 정정해서 지칭해야 할지도 모른다. 성녀는 성녀였으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서임이 취소되었으므로 성적(聖籍)에서 이름이 영구적으로 삭제되었으니까.



그녀가 성녀로서 리스덴 공작령의 교구로 수련하러 왔을 때, 관례적으로 공작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리스덴의 젊은 공작 나폴드는 넓고 화려한 공작성의 알현실에서 리스덴 교구 성직자 발령을 알리러 찾아온 아름다운 성녀를 보고 그만 한눈에 반해버렸다.



한순간 할 말을 잃고 멍하게 성녀를 쳐다보던 공작은 주위에서 의아해하는 시선을 받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시선은 성녀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고, 그녀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공작의 두 눈은 누가 보아도 기묘할 만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이, 이런…….”



리스덴 공작이 억누른 목소리로 낮은 침음을 흘리다가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지?”



몸 안에 내재된 신성력이 발현된 다음부터 수도원에서 수련을 받느라 세상 나들이가 낯선 젊은 성녀는 대뜸 이름을 묻는 공작에게 예를 다해 공손히 대답했다.



“신시아라고 합니다. 각하.”



성녀의 이름을 듣자 숨을 날카롭게 들이쉰 젊은 공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대로 권좌의 계단을 내려왔다.



뚜벅뚜벅.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걸음을 재촉하며 성녀에게 다가간 그는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는 건장한 검사이자 늠름한 사내였기에 충분히 위압적이었다. 낯선 공작을 즉시 사내로 인식한 성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빤히 다가오는 그를 응시했다.



“신시아 성녀.”



남자다운 묵직한 음성이 알현실에 울려 퍼졌다. 우뚝, 그녀 앞에 멈춰선 나폴드를 마주한 성녀는 급격한 체격 차이를 실감하며 몸을 굳혔다.



성녀가 보기에 그는 집채만 했다.



검소, 검약, 금욕을 모토로 생활해 온 성녀의 신장은 평균에 못 미쳤으며 단정한 성복을 입은 그녀의 허리는 한 줌도 되지 않았다. 느닷없이 공작을 마주하게 된 성녀는 가녀린 몸을 흠칫 굳혔다.



“신시아?”



“……예.”



성녀가 얼어붙은 목소리로 작게 답했다. 그러자 나폴드의 입가로 만족스러운 옅은 웃음이 스치고 지났다.



“잠시 신의 뜻에 관해 묻고 싶은 말이 있어.”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내뱉는 공작의 말에 성녀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안절부절못했다.



“흠흠.”



그러자, 성녀의 뒤에서 두 사람의 기묘한 조우를 지켜보던 다른 원숙한 성직자가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제가 말씀 올리겠습니다. 각하. 신시아 성녀는 이제 막 신전에서 속세에 나와 원론적인 신앙이론과 교리에만 익숙할 뿐입니다.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오묘한 신의 뜻은 연륜 있는 다른 성직자들에게 물으심이 지당하십니다.”



“몰젠 대주교.”



리스덴 공작의 나직한 호명에 대주교는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예. 각하.”



“내 예전부터 궁금해하던 것이네. 이 사안은 특별히 성녀에게 묻고 싶은 영역이니 그대가 답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그런고로, 잠시 신시아 성녀와 독대를 청하네.”



엄숙한 선언과도 같은 리스덴 공작의 말에 성직자들이 웅성거렸다.



공작이 대주교를 면전에서 무시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성녀는 단지 육신에 신성력이 발현된 신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신학에 대해서 깊이 있는 지식을 갖췄다고 말하기 어려웠기에 공작의 요구는 어폐가 있었다.



“가, 각하. 그것은…….”



대주교가 저어하며 말꼬리를 흐리자, 리스덴 공작은 불쾌한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고개를 돌린 그는 위엄을 담아 서기관에게 말했다.



“서기관.”



“예. 각하. 하명하십시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성녀의 교구 수련을 허락하지 않으면, 어찌 되는 것이지?”



그러자 알현실의 가장자리에서 지극히 사무적인 답변이 들려왔다.



“신시아 성녀는 서임 직후 초임으로 우리 공작령으로 발령받은 상태입니다. 공작님께서 리스덴 교구 내의 성녀 수련을 거부하신다면, 그녀는 다시 신전으로 돌아가 다른 교구의 발령을 대기해야 합니다. 교령에 따라 성녀 임명은 교구 초임 후 3주의 수련 과정을 거치고 난 뒤에 정식으로 확정됩니다.”



서기관의 말을 들은 리스덴 공작은 득의양양하게 입매를 끌어올리며 대주교를 직시했다.



“들었는가? 그렇다는군. 나는 지금 성녀를 신전으로 돌려보낼까 생각 중이야. 그럼 신시아 성녀가 아니라, 신시아 수녀인가?”



비아냥거리듯 어조를 늘인 나폴드가 눈썹을 슬쩍 올리며 말을 이었다.



“아니겠군. 수녀 수련을 받지 않았으니 수녀도 아니야. 그럼 일개 신도에 불과하겠는걸?”



위협적인 발언을 들은 몰젠 대주교는 심기가 언짢은 투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당분간은 그렇겠지요. 공작 각하.”



“성스럽고 고귀한 신의 사역자인 성녀가 일개 신도가 되다니. 그런 불미스러운 사건이 벌어지는 것을 진정으로 원하지는 않겠지? 대주교.”



“…….”



나폴드의 말을 들은 대주교는 창백하게 안색을 굳혔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야. 개인적인 궁금증이 해결되면 마차로 고이 데려다주겠네. 그럼?”



리스덴 공작이 잡아먹을 듯 눈을 번뜩이며 말하자, 주춤주춤 물러난 몰젠 대주교와 성직자들은 신시아 성녀만을 홀로 남겨두고 알현실을 떠났다.



“…….”



홀로 남은 신시아 성녀는 쭈뼛쭈뼛 어깨를 좁히고 도르르 눈동자를 굴려 알현실을 살폈다.



오늘 일정은 완전히 어긋나 버렸다. 간단히 리스덴 공작에게 인사를 올리고 신전으로 돌아가면 끝날 일이었는데 젊은 공작이 이상한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모든 일이 복잡하게 꼬여버렸다.



“성녀와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다. 다들 따로 부를 때까지 자리를 물리도록.”



리스덴 공작의 명을 들은 서기관, 사무관, 기사, 병사, 그리고 궁정 귀족들까지 모두 알현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실내를 떠나는 마지막 발소리마저 잦아들고 정적이 찾아왔다.



쿵.



육중한 알현실의 문이 굳게 닫히자, 홀로 남은 신시아 성녀는 흠칫 놀란 가슴을 손바닥으로 내리누르며 긴장을 곤두세웠다.



“아무래도, 원활한 진행을 위해서는 여기가 나을 거 같아서 말이야.”



리스덴 공작은 신시아 성녀 앞에 바짝 다가와 그녀의 고개 숙인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제게 물으실 말씀이 무엇인지요.”



성녀가 어색하게 입술을 달싹였던 그때였다.



“그건 말이지…….”



느리게 말꼬리를 늘린 공작은 갑자기 눈빛을 번뜩이며 길고 단단한 팔을 앞으로 뻗어냈다.



“꺄악! 아, 으……, 읍!”



순식간에 허리를 잡히고 입술을 틀어 막힌 성녀는 무시무시한 완력에 의해 알현실의 차가운 바닥으로 무너졌다.



그녀는 쓰러진 채로 겁탈당하기 시작했고, 한 번 그녀를 완전히 취한 공작은 권좌 위에서, 알현실 계단에서 쉼 없이 그녀의 육체를 탐했다.



마침내 들끓는 혈기를 배출해 육체적 욕구를 전부 해소했을 때, 이미 날이 어두워져 밤이 지나고 새벽녘 동이 터왔다.



그날 이후로 오랫동안, 성녀는 원래 그녀가 있어야 할 신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대신 리스덴 공작성의 깊숙한 침실에 갇혀 지냈다.



성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비탄에 잠겨 지내며 틈틈이 기회를 노려 탈출을 감행했다.



그러나 안팎으로 촘촘한 공작의 집요한 감시의 손길을 빠져나가는 일은 불가능했다.



절망에 갇힌 컴컴한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성녀는 낙담에 물들어 꽃 같았던 표정과 감정을 지워나갔다.



그러다 마침내, 이 년여의 검은 늪과 같은 시간이 지난 후에, 공작성의 깊숙한 침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신시아 성녀는 자살했다.



아네트를 낳고 세상을 향한 우렁찬 울음소리를 확인한 그날, 자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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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30 23:46 | 조회 : 240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