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공 X 복수수 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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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배경이 태형의 시야에 들어오며 동시에 태형이 집에 도착했다.

자신의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늑했던 온기는 온데간데없고 차가운 공기만이 집안을 맴돌았다. 텅 빈 집안을 둘러보다, 식탁 위에 남겨진 은행나무처럼 샛노란 포스트잇에 적혀진 문장을 확인했다.

-태형아, 엄마 오늘 일 다녀올게-

오직 어머니가 남기고 간 그 포스트잇만이 따뜻했다. 그렇지, 태형의 어머니는 아직 어린 태형을 위해 꽤 먼 곳에서 일하는 태형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항상 태형을 돌봐주고 동시에 일도 나가셨다. 어머니는 항상 힘들어도 아름답게 웃음을 유지하시는데 왜 나는,

더이상 들려오지 않는 한여름의 매미 울음소리도 태형이 아 이젠 정말 가을이구나- 하고 느끼게 만들어주었다. 매미는 오랫동안 땅속에서 빛을 보지 못한 채로 답답하게 자라나, 여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빛을 보고 실컷 울어대다 생을 마감하는 가여운 곤충이다. 그런 가여운 매미인데도 불구하고 울음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가끔 여러 사람들의 비난을 받곤 한다. 자신도 매미와 같은 처지였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이렇게 견뎌왔는데 더 나아지긴 커녕, 훨씬 푸대접을 받고 있다. 차갑게 식은 집안이 태형의 마음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아차, 몸에 걸치고 있던 윤기의 체육복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벗어버렸다. 전신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몸엔 흉한 생채기들과 밤꽃의 흔적들이 이곳저곳 남아있었다. 진심으로 자신의 살을 도려내고 싶다 생각한 태형이었다. 그렇게 태형은 편한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쌀쌀하네"

학교에 퍼진 거지같은 소문, 그걸 믿는 반 아이들의 경멸 섞인 눈빛, 그리고 자신을 항상 아프게 하는 정국. 이젠 지긋지긋했다. 앞으로 이 시련을 이겨나갈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결과는 같을 것을 잘 알았기에 더욱 두려웠다.

그러다 자신의 방, 조그만 쓰레기통 안으로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반짝이던 것의 정체는 태형이 얼마전에 제 어머니를 생각하며, 미련없이 쓰레기통으로 던져넣었던 그 커터칼이었다.

커터칼 외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조그만 쓰레기통에서 커터칼을 꺼내들며 태형은 생각했다.

오늘은 할 수 있을 것 같아

-

"아직 밖인가, "

윤기는 아까 태형과 헤어지기 전, 서로 전화번호를 주고받았다. 집에 도착하면 먼저 연락을 넣겠다던 태형이 아직까지도 연락이 없자, 윤기는 조금 걱정되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잊어버린 건가, 윤기는 의아해하며 태형의 번호로 먼저 문자를 넣었지만 역시나 답장은 없었다. 이거 영 서운하네-

열린 복도 창문을 통로삼아 불어오는 바람이 차가웠다. 가을인가, 다시 한 번 가을이 왔음을 제대로 느낀 윤기였다. 왠지 평소엔 후덥지근하게만 느껴졌던 복도가 오늘따라 더욱 시린 것만 같아, 추운 건 딱 질색인 윤기는 자신의 반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 따분한 학교는 언제 마치려는 건지, 윤기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며 칠판에 적힌 시간표를 참고하여 앞으로의 남은 교시를 세어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시간이 참 느리게 간다며 제 국어 교과서 25 페이지 종이를 한 장 찢어 종이접기를 하고 있었다. 그 꼴이 꽤나 하찮고 웃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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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륵-

날카롭게 반짝이는 칼날이 위험해보였다. 그러나 전처럼 걱정이 되거나 두렵진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의 태형은 자신의 소중한 친구인 윤기와 사랑하는 제 어머니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주 고통스러웠기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괴롭고 슬플 뿐, 태형은 이 시련을 확실하게 이겨낼만큼의 위인은 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흉한 커터칼을 자신의 손목에 가져다대어 뜨거운 혈액이 흐르는 통로와 함께 자신의 목숨도 끊어버릴 생각으로 태형은 결심한 듯 칼날을 세우고 자신의 손목을 베어냈다.

"아,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는다는 것은 태형의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나 보다. 정말 멀쩡했다. 굳이 무언가 바뀌었다 말하자면 보기 싫은 생채기가 하나 더 늘어난 것이 다였다.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제서야 태형의 머릿속엔 자신의 부모님과 윤기가 다시 떠오르며 제 손목에서 느껴지는 따끔함이라는 고통을 느꼈다. 송글송글 핏망울이 하나 둘씩 맺히더니 태형의 고운 살결을 가르고 새빨간 피가 흘러나와, 붉은 길을 만들어나갔다. 자신도 모르게 순간적인 충동으로 실수를 저지른 것이 허탈했던 태형은 울컥-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피가 묻어, 더럽혀진 커터칼을 방바닥으로 멀리 던져버렸다. 뜨거운 눈물이 자신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 순간에도 정국을 떠올리며 혼자 가슴아파하고 자살을 떠올리며, 손목이나 긋고 있는 자신이 한심해졌다. 어설픈 솜씨로 베었기에 더욱 쓰라린 것 같았다. 아니, 정국 때문인가- 태형은 결심했다.

정국에게서 벗어나자고,

이제 그만 정국을 잊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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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9-21 21:28 | 조회 : 4,926 목록
작가의 말
Gelatin

오랜만입니다 여러분! 보고 싶었어요 ㅜㅠ 이제 어느정도 회복했으니 또 좋은 글 많이 연재하겠습니다! 모두 사랑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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