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소문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연약하고 바보 같은 스텔라 아가씨가 검술의 천재. 케인 도련님을 이겼다는 이야기는 심심한 하인들의 간식거리로 딱 좋았다.
눈덩이를 굴리면 새하얀 눈이든 더러운 물질이든 흙이든 붙어 커지기 마련이다.
하인들의 말은 오가면 오갈수록 더더욱 없는 말 있는 말 다 붙어 어이없는 소문이 나기까지 이르렀다.

케인까지 방에서 나오지를 않으니 ‘스텔라가 케인을 죽였고, 백작은 그걸 숨기기 위해서 계속 밥을 주는 척을 하고 있다.’ 라는 우습고 바보 같은 소문이 하인들 사이에서 돌고 돌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텔라는 자신의 취미를 마음껏 즐겼고, 향긋한 차에 같이 먹을 달달한 다과들을 입안에 넣으며 독서를 즐겼다.

그렇게 나날을 느긋하게 보내고 있던 때, 시녀 제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스텔라를 불렀다.

“ 아가씨... ”

“ ....”

스텔라는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는 척, 향기로운 차로 달달함을 씻겨내며 잔잔히 미소를 지었다. 제니는 눈을 질끈 감으며 다시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 스텔라 아가씨...!”

스텔라가 긴 속눈썹을 느릿하게 깜빡이다 눈동자를 미끄러트리며 제니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바라본 것은 ‘말해도 된다.’라는 허락의 표시였기에 제니는 갈라지는 입술에 침을 살짝 바르고 말을 이었다.

“ ...본 왕국. 제네프 폐하의 황태자 체르 핀님의 연회가 있다고 합니다.
아켈리온 백작님께서... 꼭 얼굴을 비추라고,.. ”

“ ... ”

스텔라의 고운 미간은 순식간에 구겨졌다.
대체 그런 귀찮은 짓은 왜 한단 말인가..
연회에 간다는 것은 무겁고 지독한 냄새가 나는 화장과 숨 쉬기가 답답한 코르셋에 속치마와 레이스 또 드레스. 몇 개씩 겹쳐 입어 더워도 덥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뿐 아니라 지우고 벗고 할 순간도 힘겨울 것이 분명했다.
벌써 진절머리가 날 것 같은 상황에 스텔라는 무거운 숨을 내뱉었다.

“ 후우...언제인지 알려주겠니. ”

마음 같아서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백작가 주인인 자신의 아버지가 가라는데
안 가기에는 더 귀찮아질 것 같았다.

“ 저도 갑작스럽게 받은 것이라서... ”

“ 그래서, 언젠데 ”

“ ... 오, 오늘밤이라고 .. ”

“ 뭐? ”

안 그래도 기분이 안 좋은 상태에서 오늘밤이라니.. 그것만큼 스텔라의 기분을 망치는 말이 과연 또 있을까 싶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열린 문 밖을 보니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는 시녀들이
방황하고 있었다.

왜, 저렇고 있나 했더니만 화장과 옷을 입히기 위함이었다.
모두 그 빌어먹을 연회를 위해서 말이다.
스텔라가 깊은 한숨을 쉬고 알겠다며 손짓하자 문 밖에 있던 시녀들이 하나 둘 들어왔다.

스텔라는 그저 눈을 감고 시녀들이 하는 대로 몸을 맡겨 이 시간이 얼른 끝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

“ 세상에.. 아가씨.. 너무 아름다우셔요. ”

제니의 말에 스텔라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적절하게 붉게 물든 입술과 나비가 앉은 것처럼 팔랑이는 긴 속눈썹에 하얀 피부와 녹아내리는 금발이 마치 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감정이 없는 냉철함까지 과연 살아있는 사람인지를 의심할 정도였다.
백색의 드레스까지 그녀의 외모에서 빛을 더했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그녀 본인에게는 이질적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얼굴과 몸이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고 신경 하나하나 모든게 자신과 이어져있었다.

자신의 손에 있던 굳은살은 사라진 곱고 작은 손을 보며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멍을 때리고 있자 제니가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 아..가씨, 이제 나가셔야 합니다. 마차를 대기시켜 놓았어요. ”

제니의 말에 스텔라는 화장대 앞 의자에서 일어났다.
손을 꼼지락 거리는 것을 보며 스텔라는 화장대 서랍 안 붉은색 루비 귀걸이를 제니에게 던지듯 주었다.

“ !... 감사합니다! ”

제니가 신이 나 펄쩍뛰며 얼굴이 잿빛에서 생기가 돌았다.
한 동안 귀찮게 할 일이 없겠거니 생각하며 스텔라는 방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자 제니가 곧 뒤따라 왔고, 그새 꼈는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붉은색 루비 귀걸이가 흔들리며 빛을 냈다.

스텔라는 현관 쪽으로 나가자 아켈리온 백작. 스텔라의 아버지가 기다리며 서있었다. 스텔라를 위 아래로 훑으며 만족스러운지 입 꼬리를 올려 비틀어 웃었다.

“ 어여쁘게 입었구나. 내 딸이지만 참으로 고와. ”

“ 감사합니다. ”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간단하고 필요한 인사만 하며 스텔라는 예법을 차렸다.
스텔라는 별 눈길 없이 열어진 문으로 나가며 마차로 향했다.

마부가 손을 내밀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텔라는 스스로 마차에 올라서 앉았다.
백작들이 앉는 마차라 그런지 나름 폭신했다.
내부도 은근히 넓어 딱히 부족한 느낌은 없었다.

“ 잘 다녀오거라. ”

마차 밖 창문으로 백작이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는 스텔라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스텔라는 살짝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

“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
마부의 말에 스텔라는 열려진 마차 문을 통해 내렸다.
치마의 끝이 끌리지 않도록 손으로 살짝 잡아들어 올리며 연회장으로 향했다.
스텔라가 연회장 문 앞에 서자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가 말을 던졌다.

“ 성을 밝혀주십시오. ”

“ 스텔라 드셀 아켈리온. ”

짤막하게 딱 필요한 내용만 말을 하자 기사가 끄덕이며 문을 열어주었다.
예를 표하며 ‘즐겁게 즐기시기를’를 마침으로 스텔라는 차분히 들어갔다.
스텔라가 들어가고 기사가 그녀가 왔음을 큰 목소리로 외쳐 알렸다.
그 때문에 모두의 시선이 문 쪽에서 들어오던 스텔라에게 몰렸고, 그녀의 눈부신 외모에 넋을 잃는 이들과 그녀를 무시하며 비웃는 이들, 더러운 듯 인상을 찌푸리는 이들이 스텔라의 눈에 보였다.

‘ 달가운....시선은 아니네. ’

스텔라는 그러거나 말거나 유유히 회장 가운데로 향했다.
소란스러워야 하는 연회장이 침묵으로 잠겼다.
이는 사람들도 스텔라가 평소와는 같지 않음을 본능적으로 인지했음을 의미했다.
처음 연회장에서 불안함과 소심함 때문에 흔들리던 푸른 눈동자가 올곧고 흔들림 없이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전쟁 속 주군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스텔라를 바라보며 침묵을 유지하던 때 누군가 그 침묵을 깨고 스텔라에게 말을 걸었다.

“ 반갑습니다. 영애. ”
스텔라가 눈길을 주자 분홍색 머리의 소녀가 귀엽게 웃어보였다.

“ 저는 보밀리아가의 2째 영애. 카밀라 보밀리아라고 합니다. ”

“ 스텔라 드셀 아켈리온입니다. ”
카밀라가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인사하자 스텔라도 아름다운 몸짓으로 인사를 했다.
그 예스러운 예법에 모두의 시선을 다시 한 번 끌어 모았다.
카밀라가 침묵을 깬 덕분에 사람들은 하나 둘 씩 다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 요새 계속 사교계에 나오시지를 않아 걱정했답니다.. 사교계가 낯설어 집 안에 숨죽이고 있으면 어쩌나..하며 얼마나 마음이 좋지 못했는지..”

카밀라가 조곤조곤 말하며 빙긋 웃었다.

“ 하물며 마음도 여리신데..마음의 병이라도 앓고 있는 것이 아닌지...심히 걱정스러웠지요. 다만, 제 걱정은 기우였나 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연회장에 오시니 제가 다 기분이 좋네요. ”

“ 걱정해주셨다니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군요. 제가 최근에 몸이 좋지 못했던 지라 사교계에 잘 못 나왔답니다.”

“ 어머.. 그랬군요. 몸이 안 좋으셨다니 .. 요새 유행병이 가장 무섭다던데- ”
카밀라가 ‘옮기면 어쩌려고 위험하게 여기에 온 거에요?’라는 말을 삼키며 나긋하게 미소를 지었다.

“ 확실히 유행병이 무섭다고 하죠.. 그러나 다 나았으니 걱정은 마세요. ”

“다행이네요.. 아 그렇고 보니.. 영애. 혹시 사교계가 낯서신 건가요? 유독 영애들과 어울리지 못 해서 말이죠. ”

카밀라가 다정한 웃음인지 조소인지 모를 표정을 하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아마도 그것은 스텔라를 향한 그녀의 조소를 가리기 위함이리라
그에 스텔라가 꽃같이 미소를 지으며 고운 입술을 열었다.

“ 짐승에게도 제 무리가 있을 텐데.. ..”

“.....네??”

스텔라가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찾는 시늉을 하곤 빙긋 웃었다.

“ 유독 무리에 끼지 못하는 짐승이 하나 둘 씩은 있는 법이죠.. 그런 경우에는 2가지의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너무 월등히 뛰어나거나-.... ”

스텔라가 눈부시게 웃으며 자신을 가리키듯 가슴에 손을 얹다가
다음에 이어질 말로 카밀라를 가리키듯 손을 내려 공손히 모은 뒤 주시하곤 말을 이었다.

“ 수준 이하이거나. ”

카밀라는 스텔라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해 눈살을 찌푸렸다.
스텔라의 행동을 보니 자신은 전자임을 나타내는 것 일 터였다.
그렇다면 굳이 후자를 언급한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카밀라가 머리를 잔망스럽게 굴리며 답을 내렸다.

“ ....혹시.. ”
카밀라가 한 쪽 입 꼬리를 씰룩거리며 어이없는 듯 숨을 내뱉었다.

“ 수준 이하라는게..- 제게 하는 말인가요? 영애. ”

“ 어머.. ”

스텔라가 큰 눈망울을 동그랗게 뜨자 카밀라는 자신이 잘 못 이해한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못을 박 듯 스텔라의 말이 그녀의 뒷머리를 강하게 내리쳤다.

“ 카밀라 영애라고 하셨죠? .. 이런, 죄송합니다. 전 또 웬 어린아이가 징징되는 칭얼거림에 오해했네요. 다행스럽게도 영애가 아주 멍청한 건.. 아닌가봅니다. ”

“ 네?! ”

“ 시녀든, 웬 어린아이든 다 들었으면 굳이 왜 반문하는지......제가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예법이라도 생겼나 보죠?? ”

카밀라가 귀여운 미소를 지우고 표정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그리고 그녀 뒤로 그녀의 무리인 듯. 하나 둘 씩 보호하듯 진을 쳤다.
스텔라는 그 꼴이 우습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카밀라는 좋다며 위풍당당한 얼굴로 자랑했다.

“ 어디서 그런 품위 없는 말을 배워 오신 것인지 몰라도, 보세요. 영애가 말한 ‘ 무리에 어울리지 못한’ 조건은 제게 맞지 않아 보이는군요. ”

카밀라의 말에 그녀 뒤에 있던 사람들이 깔깔 웃으며 스텔라를 조롱했다.

“ 수준 이하인 짐승들이 억지로 무리를 지어 만들어 봤자.. 멍청함을 과시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 법이죠. 하기야 외롭진 않겠네요. 제가 생각을 한 것보다도 꽤나 수준 이하인 분들이 많아 보이니 말입니다. 무리를 지어낼 수 있을 정도이니..... 꽤나 우스운 구경거리군요. ”

스텔라가 입가를 가리지도 않은 채 한심하듯 바라보았다.
얼굴을 잔뜩 붉힌 채 이를 가는 그녀들을 뒤로 하며 스텔라는 고고하게 웃어주었다.
연회장 샹들리에보다도 눈부시게 빛나는 그녀의 웃음이 다시 한 번 굴욕을 안겨주었다.

스텔라는 그렇게 그녀들에게서 멀어지고 난 뒤 마땅히 쉴 만한 곳을 찾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불편하고 높은 구두 때문에 발이 아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과거에 단련된 그녀의 발이었다면 아무 감각도 없었을 테지만 지금은 너무나 가녀린 발이었다.

‘ 저기서 쉬면되겠군. ’

꽤나 깊숙이 있는 기둥 뒤 의자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외진 곳이라 사람들도 딱히 오지 않을 것 같아 그녀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가 앉았다. 푹신한 쿠션이 그녀에게 안식을 안겨주던 찰나 연회장 연주자들이 일체 큰 소리를 내며 웅장하게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모았다.

“ 황태자 전하 나오십니다!! ”

‘ 무슨 일인가 했더니만.. ’

스텔라의 순간적인 호기심은 금방 사그라졌다.
어찌 보면 자신을 이곳에 오게 만든 장본인인데 썩 달갑지는 않았다.
웅장한 음악이 멈추고 황태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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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4-23 22:30 | 조회 : 1,775 목록
작가의 말

오랜만에 가지고 왔어요! 역시 쓰는 재미가 초반에는 너무 쏠쏠합니다. 훟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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