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재림이의 하루

재림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기다랗게 뻗은 손가락이 번들번들한 고급 차량에 가볍게 부딪히며 툭툭거리는 소리를 낸다.

"하나."

재림이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악! 잠만, 잠만 기다리라고!"

"둘."

"나 두고 가면 엄빠한테 이를거야!"

"셋."

"아, 진짜. 너무해."

"넷."

자동차를 툭툭 건드리는 재림의 손길이 빨라졌다. 벌컥 소리와 함께 철창대문이 열렸다. 어깨를 넘어선 머리카락을 휘두르며 여자아이가 차 가까이로 달려왔다.

"다섯."

"왔다고! 왔잖아! 문 좀 열어!"

운전대를 잡은 운전기사님이 문을 열어주자, 여자아이는 숨을 흡 들이쉬고는 차에 탔다.

"야, 이유림 얼굴이 그게 뭐냐?"

재림의 말에 유림이라 불린 여자아이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스스로를 가리켰다.

"나? 왜..."

"얼굴 화장을 대체 얼마나 한 거야. 엄마가 보면 기절하시겠다 야."

"아, 이 정도는 다른 애들도 다 하거든?"

"나를 고작 그 화장으로 40분이나 기다리게 한거냐?"

재림은 인상을 찌푸리며 유림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러고보니, 그녀가 입은 치마가 만만치 않게 짧다. 재림이 다시 미간을 조였다.

"엄마 아빠가 탄 차는?"

"내가 먼저 보냈어. 아무래도 네가 나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아이씨..... 그렇게 오래 안걸렸는데...."

유림이 머리를 긁적였다. 두 사람의 아빠가, 원래 부유했던 할아버지와 별개로 열었던 사업에 크게 성공해서 벌인 파티였다. 두 사람에게도 무척이나 중요해서 오랫동안 준비를 한 것인데 쓸데없는 화장 때문에 늦게 생겼다.

유림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재림은 애써 목 끝까지 터져나오려는 한숨을 참으며 운전기사님께 부탁했다.

"최대한,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

***

다행히도 두 사람은 알맞은 시간에 도착했다. 파티장 입구에 달린 커다란 고전적 괘종시계가 흔들거리며, 시간을 알려댔다.

"재림아, 유림아!"

저 멀리서 하윤이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약간 샴페인을 얻어마셨는지 뺨이 상기된 하윤은, 오랜 시간의 흐름에도 풋풋한 아름다움을 비쳤다. 약간 펌이 들어간 머리카락은 벌써 중년에 다다르려는 하윤을 더욱 아이처럼 보이게 했다.

"엄마아, 오빠가 자꾸 나보고 뭐라고 지랄거렸어."

유림은 대뜸 하윤에게 안기며 재림을 삿대질했다. 얼탱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재림이 입만 뻐끔거렸다.

"또 싸운거야? 둘이 따로 얘기해서 화해해야지."

"싸운 것도 아냐. 이유림이 시간을 질질 끌길래 오빠로써 훈수 좀 놓아준 거 뿐이지."

"오빠는 무슨, 지가 유리할 때만 오빠래..."

유림이 발을 동동 구르며 하윤에게 더 세게 안긴다. 하윤은 쿡- 웃고는 유림을 달랬다. 이제 막 중학교를 졸업한 유림은 아직 철이 덜 든 아이스러움이 남아있었다.

"어? 근데 유림아 너 얼굴이."

"아....."

"화장했어? 진하네..."

"아, 조금, 근데 이 정도는 누구나 한단 말이야."

유림이가 또 다시 발을 동동 구르더니 제 엄마 품을 뿌리치고 뛰쳐나간다. 하윤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고는 재림을 바라보았다.

그의 아들은 몰라보게 커 있었다. 적어도 하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클 것이었다. 얼굴도 조각같은 늠름함 모두 제 아빠를 쏙 빼닮았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사회 초년생이었지만, 눈빛만은 강직해 보였다.

"와, 정말 몰라보게 컸네, 우리 재림이. 정장 입으니까 진짜 어울린다."

재림은 피식- 웃었다.

"엄마는 점점 젊어지고 있네."

"짜식- 그래도 빈말이라도 고맙다."

하윤이 재림의 팔을 툭툭쳤다. 최근에 운동을 하고 있는지 단단한 근육으로 밀리지도 않았다.

"따로 내가 인사해야 할 손님들 있어?"

"아니. 재림이, 넌 전에 한번 만난 적 있으니까 괜찮아. 유림이부터 집안 어른들한테 인사시키려고."

"고생하겠다, 엄마. 이유림은 말 드럽게 안들을 텐데."

"너도 그 나이 땐 똑같았어."

"그랬...나?"

재림이 눈동자를 뺑글뺑글 돌렸다. 하윤은 그의 아들을 사랑스럽게 보았다. 보통 아들이라면 제 엄마의 사랑 흘러넘치는 눈빛에 부담스러워해야 하지만, 재림은 아니었다.

"파티니까 재림이 너도 즐길만큼 즐겨도 돼. 따로 인사하는 사람 있으면 너무 쌀쌀맞게 굴지는 말고 받아주고, 알았지?"

"응."

"너 성인된 거 축하한다고 선물이 잔뜩 왔더라. 심심하면 그거 풀어봐도 되고."

하윤이 유림을 찾으면서 파티장 중앙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재림이 후 숨을 내뱉었다. 북적거리고 떠들썩하지만 집안 특유의 고급스러움이 묻어나는 파티장은 매우 넓었다. 누구 하나 사라져도 모를 만큼.

재림은 하윤이 한 말의 의도를 잘 알았다. 파티장 안에 즐길 것이 많으니 오랜만에 기분 좀 들떠 보라는 것이었다. 우습게도 그리 기분이 들뜨지는 않았다. 재림의 눈길은 자꾸 밖으로 향했다.

"저기, 혹시 재림씨 아니에요?"

처음보는 얼굴의 여자가, 멍하니 딴 생각을 하던 재림이를 불러세웠다.

"전 블론드 회사 막내딸인 임현아 라고 해요!"

여자는 재림을 봐서 들떴는지 얼굴이 상기되어있었다.

"안녕하세요."

다소 묵뚝뚝한 말로 악수를 했다. 다정함 따위 얼굴로 내어주지 않았는데, 여자는 오히려 더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목소리가 무척 좋으시네요! 이번에야 성인이 된다고 들었는데 벌써부터 연상을 보는 느낌이에요."

"그렇습니까."

"네! 저도 예쁘다는 소리 많이 듣는데, 재림씨 앞에서는 뼈도 못추릴 만큼 재림씨가 잘생기기도 하고....."

여자의 감상평에 재림은 토를 달 생각도, 맞장구를 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럴 필요성조차도 느끼지 못했다. 속으론 이 여자가 제 엄마보다 훨씬 못생겼다는 판단을 하며, 재림은 나지막히 한숨을 내뱉었다.

"아, 네."

재림의 단답에 여자는 당황한 듯 표정을 짓다가, 애써 머리를 흔들고 표정관리를 한다. 그녀가 머리를 흔들 때마다 기다랗게 세공된 귀걸이가 찰랑거렸다.

"아, 그리고 이진혁 회장님의 사업 성공 축하드려요! 한림 그룹을 물려받기 보단 더 원하시는 사업을 차리신 이야기는 너무 멋있었어요!"

"그런가요."

"네! 저희 아버지도 이진혁 회장님과 친해지고 싶다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데...."

[띠리리리리-]

슬슬 질린다고 생각할 즈음, 재림의 단조로운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잠깐, 죄송한데 전화 좀 받겠습니다. 자리 좀 비켜주십시오."

"아, 아....네..."

재림은 여자를 두고 야외 테라스 쪽으로 달려갔다. 사람이 전혀 없는 테라스 하나를 차지하고 그는 크게 심호흡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재림아, 난데...]

다정한 음성이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재림의 복잡한 심정들이 모두 목소리에 녹아 사라졌다. 감쪽같이.

"율담이형, 무슨 일 있어요?"

[아니, 나 지금 퇴근하는데, 만날 수 있나 싶어서...]

"아아...."

[아! 맞다! 너 오늘 파티날이랬지? 야, 미안하다. 그럼 나중에 만나는 걸로...]

"괜찮아요! 지금 만나요."

재림이 다급하게 외쳤다.

"저 할일은 나름 다 끝났으니까, 갈 수 있어요. 형 지금 어디에요?"

[나? 지, 지금 서울역인데....]

"당장 갈게요. 전철 타지말고 기다려요."

[에엑? 지금? 당장?]

"기다려요. 먼저 전화해 놓고 먼저 가면 화낼거에요."

재림이 억지를 부리며 휴대폰에 대고 매달렸다. 전화를 끊은 후, 그는 힘껏 달렸다. 테라스 밖에서 재림을 찾던 여자는 돌아봐 주지도 않고 앞만 보고 달렸다. 놀라 눈이 댕그래진 운전기사에게 현금을 쥐어주며 부탁했다.

재림을 태운 차가 빠르게 파티장을 벗어났다. 일탈은 달콤하고도 스릴 넘쳤다.

***

"너!"

율담이 몰라 외쳤다. 삿대질까지 하는 손이 많이 당황했는지 달달 떨리기 까지 한다.

"형, 반가워 해주지는 않는 거에요?"

"아니, 그, 좀 놀라서.... 빨리 왔네."

"타요. 어서."

재림이 차 문을 열며 그를 에스코트 했다. 율담은 이런 거는 민망하다며 재림의 손을 밀어냈다.

"나 오메가 아니라니까."

"알아요."

"왜 그래, 진짜."

얄궂게 말하면서도 싫지는 않는지 율담이 조금 웃었다. 율담은 베타이면서 몸의 성장이 느려, 재림보다 훨 작았다. 그의 작은 어깨를 내려다 보며, 재림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파티장을 도망쳤다고 하면 싫어할 줄 알았는데, 별로 뭐라고 하지는 않네요."

재림이의 말에 율담이 눈을 깜빡거렸다. 화장에 찌든 아까 그 여자의 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맑고 순수한 눈이었다.

"하윤이 형이 걱정했으니까..."

"엄마가요?"

"네가 너무 일찍 철든 것 같다고 걱정하셨어. 가끔 일반 고딩처럼 일탈도 하고 장난도 쳤으면 좋겠다고 그러시더라."

"아....."

"그래서 이번만 봐준 거야. 다음번에는 이렇게 나보러 중요한 행사에서 도망치지 마."

"네. 그럴게요."

율담은 대답만 잘하는 재림을 의심하는 눈으로 흘겼다. 되돌릴 수 없는데 어쩌겠냐 하며 한숨만 푹푹 내쉰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보려고 한 이유가 뭔데?"

"그게요...."

"어....."

"......"

"말을 해."

율담이가 답답한 듯 가슴을 툭툭 쳤다. 재림은 그걸 보고 피식 웃고는 말머리를 빙글빙글 돌렸다.

"오늘 저 선물 많이 받았다고요...."

"자랑하려고 부른거냐?"

"성인 기념 선물이요."

"아.... 너가 벌써 성인이구나..."

율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형한테도 받고 싶었어요. 성인 기념 선물."

"뭐?"

"안 주실 거에요?"

"갖고 싶은 게 뭔데?"

재림이는 턱에다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는 안어울리게 고민하는 척을 했다. 눈은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을 잔뜩 보내면서.

"제가 갖고 싶은 선물은 바로 ㅎ..."

"바로 형이에요 라고 말하는 건 아니지? 그런 고전적인 고백을?"

재림이 분위기 깬다는 눈치를 주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선물로 형을 가지면 안되는 거에요?"

"난 베타고 넌 알파잖아. 그런건 맞지 않아."

"저희 엄마가 자고로 사랑에 나이나 성별없다고 하셨거든요."

율담은 곤란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게 부끄러움 같은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곤란하다는 표정이라, 재림의 기분이 팍 상했다.

"그럼 키스라도 해줘요."

"아니....뭔..."

"갖는 건 안된다면서요? 설마 키스도 안되는 거에요?"

율담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재림은 그걸 허락으로 알고 율담의 턱을 잡아 끌었다. 두 사람 모두 첫 키스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치 첫키스 처럼 두근거림을 나눴다. 키스는 깊지 않고 가벼웠고 그만큼 담긴 감정도 가벼웠다.

타액이 묻은 입술을 소매로 쓰윽- 닦아내었다. 재림이 율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형도 좋아 하잖아요. 저."

"야......"

재림이의 눈이 예쁘게 휘었다. 본능적으로 하윤이형의 남편을 연상시키는 얼굴이었다. 하윤이형을 유혹하던 이진혁 회장을 어쩜 그렇게 빼닮았는지 모른다.

"형이 저한테 완전히 빠져들 때까지"

"......."

"제가 유혹할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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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6-01 19:16 | 조회 : 3,461 목록
작가의 말
새벽네시

화요일에 꾸는 꿈을 사랑해주신 많은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 조금 쉬었다가 차기작 《날개와 수갑》으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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