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눈 앞은 끝도 없이 어두웠다. 눈을 감고 있는 건지, 끝없는 어두운 미로 속에 갇힌 건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

진혁이 인형을 양팔 한가득 들고 집안에 들어섰지만, 마중나오는 발걸음은 없었다. 예상했던 놀람과 감동 가득한 목소리도 없었다.

불길한 느낌에 진혁이, 들었던 인형을 모두 내팽겨쳤다.

"하윤아?"

"....."

"하윤아!"

진혁은 순간적으로 피가 모두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진혁의 창백한 고함에 깼는지, 재림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이어서 터진다.

진혁은 방마다 문을 열어 집안을 헤집으며 하윤을 찾았다. 지금만큼이나 거대한 집이 싫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세 개의 화장실 중 하나에, 그토록 보고싶었던 하윤이 있었다. 이마에 붉은 선혈을 주르륵 흘린 채로.

"하윤....."

***

눈이 흐릿하게 떠졌다. 눈썹에 방울방울 무언가 맺혀있었다. 하윤은 두려웠기에 그것이 붉은 액체라는 사실은 무시했다.

자신의 어깨를 바스라질 듯 잡은 이가 흐릿하게 보였다. 찌푸려진 미간과 잔뜩 당황한 표정이 차례로 선명하게 나타난다.

"혀, 혁..."

하윤이 타들어가는 목구멍으로 겨우 개미만한 소리를 냈지만, 그는 알아채지 못했다. 이어 규칙적으로 끊기는 통화음이 들렸다. 진혁의 다급한 목소리가 간간히 들린 것 같기도 했다. 하윤은 정신을 그대로 놓아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영영 제정신을 못 차릴까봐 두려웠다.

"으으.....흐으...."

하윤의 억눌린 신음소리를 들었는지 진혁의 얼굴이 다시 눈 앞에 비쳤다. 그리고 무언가 뚝- 뚝- 떨어졌다. 제대로 된 사고를 못한 하윤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게 진혁의 눈물이었단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건 미안함과 죄책감이 쌓이고 쌓여, 응어리진 채로 액체의 형태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분노와 안타까움도 섞여, 그대로 하윤의 창백한 뺨 위로 떨구어졌다.

***

하윤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진혁의 얼굴이었다. 왠지 모르게 초췌해진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하윤의 정신이, 꽃잎 터지듯 트였다.

병원 병실 안으로 보이는 방 안에는 시계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고요한 상황으로 봐서는 시간이 꽤나 흐른 것이 분명했다.

"하윤아, 정신이 좀 들어?"

하윤이 입을 벌려 소리내듯 오물거렸지만, 쉰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진혁은 걱정스런 얼굴 그대로 유지하며 하윤의 마른 입술에 빨대를 물려주었다. 부어오른 목구멍을 식히는 물이 그렇게나 시원할 수가 없었다.

"말해도 돼, 하윤아."

"아.... 아기.... 재림이, 재림이는?"

"재림이는 내가 아는 비서님한테 부탁드렸어."

하윤의 눈이 불안정하게 흔들리자, 진혁은 하윤의 눈꺼풀 위를 쓸어주면서 안심하라고 속삭였다.

"아기 다루는 데에 능숙하신 분이야. 또, 도우미 아주머니도 갔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것보다 네 몸은.... 괜찮아?"

"아아...."

"괜찮지... 않겠구나..."

진혁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면서도 하윤을 쓰다듬는 손은 멈출 생각이 없다. 하윤은 조용히 자신의 이마를 더듬어 보았다. 까칠거리는 붕대가 머리를 칭칭 감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죽을 정도로 아프지는 않아.... 상태는 어떻다는데?"

"의사선생님이 네가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도와주래. 감기몸살과 머리 타박상이야. 이마에 피부도 좀 찢어졌데."

"아...."

하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붕대를 감은 머리가 무거운 것이 느껴졌다. 조금 내리지 않은 열 때문인지, 어지럽기도 했다.

"그.... 너 회사는?"

"일 끝났어. 다시는 갈 일 없어, 이제."

"......."

하윤의 눈이 망울망울 거리는 모습을 보고 진혁은 가슴이 쓰라리게 아팠다. 울음을 참으려는 하윤에게 호두턱이 만들어졌다. 눈가 아래가 움찔움찔거리는 것이 금방이라도 터뜨릴 기세다.

"울어도 돼, 하윤아."

"흐.....흐으아앙.... 흑, 흑..."

진혁의 말과 동시에 하윤의 눈에서 굵은 물줄기가 주륵 주륵 흘렀다. 하윤의 가는 손이 힘없이 진혁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무해... 너, 너무해.... 빨리 오지, 조금이라도 빨리 왔으면...흐흑...."

"미안해. 많이 무서웠지.."

"으흑, 나, 나, 난 진짜... 죽는 줄 알았다고오..."

진혁의 두터운 손이 뜨거운 눈물을 닦아내었다. 자취를 감추어도 하윤의 눈물은 끝없이 계속 흘렀다. 하윤이 얻은 억울함과 안도감의 정도를 보여주듯 쉼 없이 흘렀다.

"내가 황제라며....흑, 흐윽..."

"........"

"윽, 윽...나보고... 황제, 하라며..."

"하윤아......"

"으으....흑, 맨날 기다리게만 하는데 그게 무슨...."

코를 쿨쩍거리고 어깨를 히끅거리면서도 하윤은 할 말을 모두 내뱉었다.

"나, 난 네가 나한테 질린 건줄 알았단 말이야.... 흐윽..."

"그게 무슨 소리야."

"너무 늦게 오니까, 히끅, 내가 귀찮아져서 일부러 그런, 그런거라고...."

하윤의 말에 진혁은 머리를 휘휘 저으며 하윤을 향해 팔을 벌렸다. 하지만, 하윤은 아픈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포옹을 거부했다.

"으흑...."

"미안, 미안해, 하윤아. 그런데 절대로 네가 싫어져서 그런게 아니었어. 나도 보고싶었어. 서류 앞에 앉아있는 내내, 네가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으으흑...."

하윤이, 그제야 진혁이 벌린 팔 사이로 들어갔다. 진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하윤의 작고 동그란 머리를 안았다. 평소처럼 부드럽게 쓸리는 머리칼 대신, 거친 붕대의 느낌이 어색했다.

하윤은 진혁의 단단한 가슴에 대고 상처부위를 살살 비볐다. 진혁은 하윤의 응석을 모두 받아주며, 그의 목덜미를 아기 다루듯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 미쳐 가리지 못한 하윤의 어깻죽지 위로 따신 무언가 떨어졌다. 생소하고도 무언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하윤은 놀라며 진혁의 어깨를 스리슬쩍 밀었다. 진혁은 평소와 같이 입술을 꾹 다물고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물기있는 눈가 위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는 점이다.

"지, 진혁아, 울어?"

".......싫어?"

"아니, 당황스러워서...."

"속상해서 우는 거야."

하윤이 고개를 들자, 진혁이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네가 아팠고, 내가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해 속상해서."

"아....."

"하윤아, 미안해."

"......으, 응."

진혁의 단단한 팔이 다시 하윤을 끌어당겼다. 하윤은 반항 한 번 없이 얌전한 몸으로 자석처럼 그에게 다가가 붙었다.

하윤이 어지럽지 않도록 뒤통수를 받쳐주면서, 진혁은 하윤의 양뺨에 키스했다. 눈물에 절여져 축축했던 뺨이 뽀송뽀송하게 마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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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5-14 23:26 | 조회 : 3,999 목록
작가의 말
새벽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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