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이거지? 우리 회사가 초창기부터 목표했던거."

"맞아. 이번에 운이 좋았어. 자금도 모아졌고 지금 당장은 조선 사업이 불황이라 파산하는 곳이 많지만 머지않아 다시 조선업이 호황을 누릴거야. 우린 그때를 보며 파산 직전의 회사를 인수해 배를 만들거고."

"그래서 이름이 '모비딕'이야?"

"어. 뭐 아버지가 그렇게 하고싶으시대."

"흐음, 배를 좋아하시는건가?"

"정확히말하자면 배가 아니라 바다야. 넓고 끝없어 예로부터 사람들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한 바다. 그 바다로 향할 수 있게 해주는게 배인거지. 그래서 아버지는 조선 사업을 하고싶으셨대."

"멋지네."

"그렇지?"

에이스가 새로 착수할 사업분석자료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작게 '바다'라고 외고있었다.

"언제 바다 한번 갈까?"

"정말?"

"네가 가고싶다면 가야지."

"또 또 그 낯간지러운 소리."

"뭐 어때?"

"저어기~ 나도 바다 좋아합니다~"

에이스의 뒤에 앉은 삿치가 빼꼼히 손을 들었다. 에이스와 함께 그를 바라봤다. 녀석도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뭐야? 둘다. 날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듯한 그 눈빛은? 설마 정말로 내가 있다는걸 잊고있었어?"

"아니."

"어."

동시에 다른 대답이 나왔다.

"어. 잊고있었어. 왜 와있는거야? 정말 할 일이 없는거야?"

"뭐라는거야 이 망할 노란머리야! 네가 불렀잖아! 이번 자금은 내가 관리하게 됐으니까 와서 들으라며!"

"사, 삿치! 진정해!"

"아, 그랬었지. 자, 이거."

흥분한 삿치를 에이스가 필사적으로 말리고있었다. 그 앞에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삿치가 서류를 받아들고 대충 훑어내려갔다.

"이제 가봐도 돼."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쇼파에서 벌떡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사내연애 금지조항을 넣자고 건의해야지 원!"

문 밖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쿡쿡쿡"

에이스가 소리내어 웃었다. 검은 정장이 잘 어울렸지만 역시 아직 어린티가 났다. 정장을 입고서도 저렇게 웃는게 이질적이었다.

"마르코, 삿치한테 너무 그러지말라니까."

"네가 계속 저 녀석 편들면 더 할거야."

"어련하겠어. 나도 이제 가볼게. 너무 오래 자리 비웠어."

"여기가 집이면 좋을텐데."

여전히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한 녀석의 볼을 쓰다듬었다.

"4시간 후면 집에 갈거야. 그때 봐. 그때까지 일 열심히 하고있어."

에이스가 문 손잡이를 돌리다말고 돌아와 가볍게 키스했다.

"다음은 집에 가서."

한 마디를 남기고 빠르게 사라졌다.

"하- 정말 미치겠군."

*

"마르코, 본래는 여자 좋아했지?"

얌전히 몸을 맡기고있던 에이스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손이 멈췄다.

"갑자기 무슨 질문이야?"

"그냥.. 난 마르코가 모든게 처음이니까 그렇다치더라도 마르코는 아니잖아. 한번쯤은 여자와 아이가 있는 평범한 가정을 생각해봤을거아니야."

우물거리며 이야기하는 에이스의 볼이 발그래했다. 꼭 잘 익어가는 고구마같았다. 그러면서도 눈을 맞춰오는게 도전적인 느낌이었다.

'정말이지 너무 귀엽단말이야.. 그치만 다른 말이 없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뭐든 상관없어. 지금은 너만 있으면 되니까."

"...가끔 평범하게 여자를 만났으면 어땠을까 해. 그럼 마르코 닮은 아기도 볼 수 있었을거고."

"말했잖아 그런거 필요없어. 너랑 만났고 너랑 밥 먹고 너랑 이야기하고 살아가는게 가장 행복하니까."

"...어."

"나중에 내가 먼저 늙고 힘없어져도 나 버리면 안돼."

"풋, 그때 봐서."

"아, 매정해. 그냥 그래라고 말해줄수도있으면서."

"우리 어떻게 늙어갈까?"

"멋지게.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큼 사랑스럽게."

에이스가 작게 웃으며 나의 목에 팔을 둘러 안겨왔다. 나보다 작은 몸이었지만 이 몸이 나를 숨쉬게 만들고 메말랐던 감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런게 살아있는것이라는 생각이 들도록했다.

*

"삿치.."

눈 앞의 광경은 처참했다. 아니 객관적으로는 깔끔했다. 단 한 차례의 공격이 정확하게 급소를 노렸고 그것이 성공하자 단번에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 다만 어지러울만큼 하얀 바닥에 피어난 붉은 자국이 처참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삿치!"

따각거리는 구둣소리가 울려퍼지는 대리석 바닥을밀치고 그 가운데 쓰러져있는 삿치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흔들었지만 그는 대답도, 움직임도 없었다. 그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만이 있었다. 끈적한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흐르고 그를 흔들던 손자국을 만들었다. 아직 온기가 남은 피가 손바닥에 고였다. 목구멍이 울컥이며 속에서 무언가 넘어올것 같았다. 온 몸에 힘이 빠져 제대로 숨을 쉴수조차 없는 듯 했다.

"에이스!"

뒤에서 마르코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그를 보려고 노력했다. 그에게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광경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습할 방법을 찾아야했다. 하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차오르고 시야는 뿌옇게 흐려져 마르코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마르코.. 삿치가.."

마르코가 달려와 나를 껴안았다. 머리가 멍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않았다. 지금 이 현실을 받아 못 하는 것 같았다. 눈물이 계속해서 흘렀다. 마르코의 어깨가 젖어갔다. 그는 말없이 팔에 힘을 주어 떨리는 몸을 감쌌다. 오늘은 구름이 끼지도 비가 오지도 쌀쌀하지도 않은 그저그런 평범한 날이었었다. 아무일도 없이 평화로울것 같았던 그런 날, 우리 모두는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늪같은 슬픔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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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8-06-19 02:05 | 조회 : 1,618 목록
작가의 말
하루, 날

축구 보셨나요? ㅠㅠ 화이팅..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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