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아, 차였다. 젠장. 꽤 좋아했단 말이야. 그 긴 금발머리도, 장밋빛 피부도, 갈색 눈동자도. 그녀는 내게 언제나 다정한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말해줬는데, 이렇게 쉽게 차버리다니..

언제나 차이는 레파토리는 같다. 내가 동양인이고, 남자라기에는 너무 여리고, 남자답지 않게 생겼고, 키도 작고, 섹스할 때 여자를 만족시키지 못할정도로 능력도, 크기도 크지 않다는거다. 거기다 나는 조루다. 결국 다시 그에게 돌아가야만 했다. 날 괴롭히고, 울리고, 그리고 그 앞에서 웃어보이는 그 괴물같은 놈에게로.


"알렉스."


백발같은 새하얀 머리칼에 파아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저런 평범한 사람들이 보면 위축될 것 같은 문신을 온몸에 새긴 그가 비열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눈을 마주치기 싫어 고개를 숙였다.


"이리와."
"...응.."


다행히 그가 나를 불렀다. 잡아먹을 듯 나를 쳐다보는 수많은 눈동자들을 최대한 피하며 나는 재빠르게 알렉스의 곁으로 갔다. 아무말 없이 그의 앞에 서 있자 그가 자신의 곁에서 헐벗고 있던 여자들을 물리고는 나를 억지로 앉혔다. 나는 잔뜩 몸을 웅크리고 그의 곁에 있었다. 그가 검은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염색 풀었네?"
".... 응..."
"다시 해 줄까?"


억누르듯 말하는 알렉스가 너무 무서웠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지만, 그가 커다란 손으로 내 턱을 잡아쥐더니 자신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불꽃같은 푸른 눈동자에 내 겁먹은 얼굴이 비춰졌다.


"대답, 해야지, 응?"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전혀 아니다. 어차피 싫다고 해도 억지로 붙잡아두고 할거면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알렉스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그의 옆에 있는 다른 이들과 내가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어색함에 안주만 주섬주섬 집어먹고 있었다.


"일어나"


그가 나를 잡아끌었다. 내 가느다란 팔을 잡은 그의 커다란 손에 나는 왠지 모를 안심을 했다. 아직 그는 나를 잡아주고 있다. 그는 나를 끌고 지하주차장안으로 들어가 그의 차가 있는 곳으로 끌고가 나를 조수석에 앉혀 단단히 안전벨트를 맨 후에 돌아가 운전석에 앉았다.

그는 급하게 차를 끌고 갔다. 어두운 밤길을 달리던 차에 한참을 아무말 없이 앉아있던 나는 조심스레 그를 쳐다보았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야경이 본래도 빼어났던 그의 외모를 더 부각시켜주는 것 같았다. 아, 눈이 마주쳤다. 나는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옆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새 그의 집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나는 여전히 그의 손에 이끌려 그 감옥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표정 좀 풀지? 누가 보면 감옥에라도 온 줄 알겠네."
"미, 미안.."


나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고 있자 그가 나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저, 저기.. 나 좀 씻으면.."
"왜, 또 도망치려고?"
"아, 아니야. 그.. 오랫동안 못씻어서.."
"... 그년이랑 같이 지낸거 아니었어?"
"....."


나는 아무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너무 쪽팔렸다. 자신있게 도망쳐 놓고 이런 거지꼴이라니. 나는 나머지 한 손으로 길게 길어버린 검은 머리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알렉스가 날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히고는 어디서 가위를 들고왔다. 그리고는 무심한 얼굴로 내 머리를 마구 잘라댔다. 이리저리 엉망으로 잘린 머리카락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나는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폰."


나는 주기 싫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가 억지로 주머니속에 있는 것을 꺼내갔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잠금장치를 풀고는 뭔가를 열심히 찾아보고 있었다.


"전화번호는."
"... 지웠어."
"... 유진."
"응..."


그가 나즈막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조금 움찔거리며 대답했다.


"그렇게, 싫다고 나가더니 이게 무슨 꼴이야?"
"......"
"또 차였지? 이번엔 뭐래. 네가 너무 남자같지 않다고 그러디?"
"......"
"아니면 동양인이라서? 아, 네가 조루라서 그럴 수 도 있겠다."


나를 놀리기 위해 그가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고, 나는 눈 앞이 흐려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내 귀에다 대고 말했다.


"그것도 아니면, 애비애미 없는 고아새끼라서 마음에 안들대?"
"......"


온 몸이 부르르 떨리며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자 그가 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신은 도대체 언제까지 내 자존심을 망가뜨려야 만족할 수 있을까.

날이 밝았다. 눈을 뜨니 침대 한 구석에서 나는 조용히 잠을 자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침대 한 가운데서 알렉스가 곤히 잠들었다. 이렇게 보면 잘생겼는데.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뭔가가 내 팔을 확 잡았다.


"어디가"
"... 씻으러..."
"같이가."


이젠 씻으러 혼자 보내지도 않는다는 건가. 하지만 이건 길어봤자 일주일뿐인걸. 어차피 그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는 또 날 죽일 듯 괴롭힐거다. 나는 알렉스가 잡고 있는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들어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알렉스가 계속해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바지를 벗고 속옷에 손을 가져가다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계속.. 볼거야?"
"니가 또 어떻게 도망칠 줄 알고."
"... 여기서 어떻게 도망을 쳐."


사방이 다 타일로 막혀있고, 작은 창문조차 없는 화장실에서.


"글쎄, 그건 모르지. 얼른 씻기나 해."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그에게서 몸을 돌려 조심스럽게 속옷을 벗었다. 이정도로 힘들어하면 안되. 아직 더 남았잖아. 차가운 물이 내게로 떨어졌다. 달아오른 얼굴이 얼른 식었으면 좋겠다.

샤워를 마치고, 덜 마른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며 부엌으로 갔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그 안에는 오직 술과 안주뿐이었다. 배가 너무 고파 나는 안주를 몇 개 꺼내들었다. 그러자 어느 새 옆에 온 알렉스가 내게 말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이건 먹으면 안되지. 내거라고?"
"...... 배.. 고파.."
"니가 직접 벌어다 먹어."
"나 일... 못하는데..."


너때문에 아무것도 못해.


"그래서?"
"... 제발.. 나 며칠동안 먹은게 어제 그 안주뿐이야."
"그동안 뭘 했는데?"


다 알면서 저렇게 물어본다. 뭘 했냐고? 뭘 하려고해도 네놈때문에 난 아무것도 못했어. 니가 새겨버린 이 문신들이 얼마나 증오스러운데.

이 일대에서도 알아주는 알렉스가 이끄는 갱집단은 틈만나면 총기사건에 살인은 기본으로 할 정도로 악명이 높다. 그러기에 그들의 문양을 온몸에 새겨버린 나는 어디에도 취직은 커녕 다른 이들에게 냉소적인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다른 지역으로 가려고 해도 이미 내가 알렉스와 친하다는걸 아는 갱들은 날 잡아다가 알렉스를 끌어내리기 위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어 차마 이 지역을 벗어나지도 못했다. 그가 참 원망스러웠다.


"... 아무것도 못했어..."
"아, 그래?"


순간 배에서 민망할 정도로 크게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잽싸게 두 팔로 배를 움켜쥐었다. 목덜미까지 달아올라버린 내 모습도 부끄러웠다.


"그렇게 배가 고픈거야?"
"......"


대답을 망설이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크게 웃으며 누군가에게 연락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왠 흑인 남자가 양손에 뭔가를 가득 들고 들어와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요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좋은 냄새에 배가 어서 음식을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민망함에 계속 알렉스의 눈치를 보고 배를 움켜쥐다가 어느 새 시간이 많이 흘렀다.

요리를 하던 그가 집을 나가고 부엌에 들어가보니 식탁에 이것저것 진수성찬으로 차려져 있었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얼른 자리에 앉아 이것저것 맛보기 시작했다. 정말 맛있었다. 알렉스는 그런 나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맛있나봐?"
"응.. 오랜만에 먹어서 그래."
"왜, 평소엔 인스턴트로 또 때웠나보지?"
"응.."


나는 계속 입에 음식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정말로 오랜만에 먹어보는 요리된 음식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거실의 소파에 눕듯이 앉았다. 허기가 지고 나른하니 졸렸다. 눈을 계속 깜빡이자 알렉스가 날 흔들어 깨웠다.


"야, 왜 여기서 자."
"어...?"
"집에 가."
"집..?"
"그래. 얼른 나가라고."


우리 집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만데 그냥 그렇게 내쫓을건가? 나는 알렉스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내게 눈길하나 주지않고 밖으로 쫓아냈다. 설움이 울컥하고 올라와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아니야, 울지마. 울지말자. 나는 그렇게 열심히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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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9-13 23:59 | 조회 : 3,988 목록
작가의 말
류화령

안녕하세요, 미친x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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