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째 날 밤

오늘 창문 너머로 아파트 옥상의 난간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어요.
그 남자, 대체 무엇을 하려 했던 걸까요?
어느 쪽이든 중요한 건 저와 상관 없다는 거죠.

위태위태한 모습으로, 오늘의 이야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그래, 오랜만에 녹음기를 준비해 주세요.


(녹음기가 재생되는 소리.)

자, 이제 천천히 말해주겠니?

"네..."

일단 이름부터 말해줄래?

"채서린... 채서린이에요..."

자. 그럼 서린아. 이제 네 이야기를 해 주면 돼.

"그.. 그날, 전 주번이라 학교에 일찍 나가봐야만 했어요.. 그래서 전날 자명종을 맞춰 놓고, 엄마에게 일찍 깨워달라고 한 다음 잤는데, 왠일인지 자명종이 울지 않은 거에요... 자명종은 둘째치고, 엄마도 절 깨워주지 않아서 일어난 다음 시간을 보니 이미 한참 늦은 시간이었어요... 재빨리 교복을 입고 방에서 뛰쳐나왔는데, 엄마가 부엌에 계시더라구요.. 그래서 짜증을 좀 냈어요... 왜 깨워주지 않았냐고. 늦어버렸지 않냐고... 그랬더니 엄마가... 엄마가 이런 말을 했어요...
'너 학교간다고 좀 전에 나갔잖아. 다시 들어와서 잔거니?'라고...."

흐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모든 일의 전조였는데... 전 학교에 늦어버린 것만 신경쓰여서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냥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고 엄마에게 짜증을 내곤 집을 뛰쳐나왔어요..."

그래서, 학교에는 늦지 않았니?

"학교는.. 학교에 도착했는데 아슬아슬하게 지각은 면했더라구요...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주번일이 아침에 혼자하기에는 좀 힘들거든요... 그래서 같이 주번을 해야 했던 친구한테 사과했어요. 미안하다고... 그런데... 친구가 그러더라구요... 뭔소리냐고... 오늘 아침 일찍부터 같이 하지 않았냐고요...."

그건... 좀 이상하네.

"네.. 저도 그때 처음 뭔가 이상하다는걸 느꼈어요... 전 아침에 분명 집에서 자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시간에 친구는 학교에서 저와 주번활동을 했다는게.... 그래서 몇번을 되물어봤어요. 정말 나랑 한게 맞냐구.. 그래도 그때마다 친구는 분명 저랑 같이 했다고 그러더라구요... 뭔가 이상했지만 더 물어봤다간 친구에게 이상한 애라는 소리나 들을까 봐 더 이상 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수업이 시작됬는데, 1교시가 체육이었어요.. 전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서.. 조금만 뛰어도 심장이 아파서 쓰러질 정도에요.. 그래서 항상 체육수업은 구석에서 구경만 하는데, 그날도 똑같았어요. 다른 아이들은 모두 농구를 한다고 체육관에서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전 체육관 구석의 작은 방에 앉아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체육관 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뭐라고 하던?

"'서린아 나이스 슛!'...이라고."

(잘못 들은건 아니고?)

네. 엄청 크게 소리쳤기 때문에 잘못 들었을 리가 없어요...
게다가 반에 서린이라는 이름을 가진건 저 하나 뿐이어서... 저는 아이들이 뛰고 있는 농구코트쪽으로 나가봤어요.
그런데... 그때 봤어요... 그때....

(뭘 본거니?)

"체육관 출입구로 재빨리 뛰어나가는 여자애의 뒷모습이었는데... 그거, 분명히 저였어요...
믿어지세요? 전 분명히 체육관의 쪽방 앞 문에 서있는데, 또 다른 제가 체육관 출입구로 뛰어나가는 걸, 다른 사람도 아닌 제 자신이 봐 버린 거에요... 제가 본 다른 '전', 제가 한번도 뛰어본 적 없는 빠른 속도로 출입구를 빠져나가서, 쫒아가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싶더라구요... 그래서 전 농구를 하고 있는 아이들한테 다가갔어요. 그런데 그 애들이 그러더라구요.. '항상 아프다고 하더니, 농구는 잘 하네?'라구요... 그래서 모른 척 하고 제가 뭘 했는지 들었더니, 갑자기 나타나서 공을 받더니 세명을 제치고 깔끔하게 레이업 슛을 성공시켰다고 하더라구요... 하지만, 하지만 그때 전..."

넌 체육관 구석에 있다는 쪽방에 있었다, 이말이지?

"네... 그 말을 들은 전, 쓰러져 버렸었나 봐요.. 잠깐 현기증이 나서 눈을 감았다 떴는데, 양호실의 침대에 누워 있더라구요... 전 제가 본 환상에 대해 양호선생님께 말하려고 했지만, 선생님은 체육시간에 쓰러져서 친구가 절 데리고 왔다고, 빈혈같으니까 좀 누워서 쉬라고 말하시고는 곧장 나가셨어요. 그래서 전 양호선생님이 돌아오시면 환상에 대해 상담하려고.. 잠깐 기다리고 있었는데..."

...있었는데?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등 뒤로 계속 누군가고 보고 있는것 같은느낌..."

있지. 보통은 기분탓이지만.

"네. 보통은 기분탓으로 끝나는데... 그날은 아니었어요... 확실히 누군가의 시선이 등 뒤로 느껴지는 거에요.. 정말 망설였지만 뒤를 돌아봤어요.. 그리고... 전 봤어요... 밖으로 이어지는 창문에... 저와 똑같은 사람이 지나가는걸..."

정말 놀랐겠구나..

"네... 정말 미칠 것 같았고, 제가 미쳐버린 것 같았어요. 전 여기 이렇게 있는데, 제가 아닌 제가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있는거잖아요?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어서... 학교가 마치고, 친구랑 같이 집에 가는 길에 친구에게 모든 걸 털어놨어요... 아침에 일부터 양호실에서 본 일까지 모든것을요... 다행히도 친구는 제 말을 웃어넘기지 않고 진지하게 들어줬어요... 제가 반쯤 울면서 이야기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제 이야기를 다 들은 친구는 제 몸이 약해서 허깨비를 본 거라고, 다른 것도 그냥 기분 탓일거라고 위로해 줬어요.. 그리고 잊어버리라고 하더라구요..."

좋은 친구를 뒀구나.

"네... 저도 친구말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어릴때부터 종종 허깨비를 보기도 했기 때무에 이번에도 그런 종류가 맞겠지...하고 믿으려 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더 이상 이 일에 신경쓰고 싶지가 않았어요...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어...언제부터 따라온건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친구와 중간에 헤어졌을때부터? 아니, 어쩌면 학교를 나서는 처음부터 따라오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어쨌든 제가 아는 건, 정신을 차려보니 누군가가 따라오고 있었다, 정도밖에... 언제부터인가...언제부터인가 뒤에서 절 따라오는 발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어요.. 제가 멈추면 같이 멈추고, 제가 좀더 빨리 걸으면 같이 빨리 걷고... 절대 더 느리거나 더 빠르지 않게... 그저 저와 같은 속도로 자박자박자박자박...."

자, 자. 서린아. 조금 진정하고. 응?

(잠깐 흐느끼는 소리와 달래는 소리)

"무....무서웠어요. 정말 무서웠다구요... 평소에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도 아닌데다가, 그날따라 주변에 한명도 보이지 않았거든요... 아니, 그렇게나 없을 리가 없는데... 어쩐지 거리도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보이고... 마치... 마치 평소의 거리와 정확하게 똑같은 다른 거리인것처럼... 그렇게 한참, 어쩌면 잠깐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저한테는 정말 긴 시간이었어요.. 그렇게 걷다 보니... 저기요, 사람이 너무 무서워지니까 오히려 오기가 생기더라구요... 때마침 벽면이 전부 쇼윈도로 되어 있는 옷가게가 나타났고, 쇼윈도를 통해서 살짝 뒤를 보면 될 것 같았어요...
전....전 곧 쇼윈도 앞을 지나갔고, 고개만 옆으로 돌리면 쇼윈도를 통해 제 뒤를 볼 수 있었어요... 저는 고개를 돌릴까 마지막까지 고민했지만, 정체도 모르는 것에 무서워하느니 차라리 봐 버리는게 더 좋을것 같았어요... 그래서 고개를 돌렸는데... 전, 제가... 제가 거기서 본 건....
제 바로 뒤에서 저와 똑같은 자세로 쇼윈도우를 통해 저를 보며 미친듯이 웃고있는 제 모습이었어요.."

...흐음. 조금 경솔했구나..

"네.. 차라리 보지 말 걸.... 제 평생에 그렇게나 놀라고 무서웠던 적이 없었어요... 저는 있는 힘껏 비명을 지르려고 했는데 뒤에서 따라오던 '나'의 손이 제 입을 막아버렸어요. 손이 정말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온몸에 소름이 쭉 돋았는데, 뒤에 있던 '제'가 제입을 막은 그대로 뒤에서 저를 안고는 귀에다 대고 속삭이더라구요... 그 차가운 목소리... 아직도 머릿속에 울려요...
"내가 너보다 뛰어난데, 왜 내가 가짜여야 하는건데...?"라고...."

...그 후로 다른 너.. 그러니까, 도플갱어를 본 적은 없고?

"또 다른 절 다시 '직접적으로' 본 적은 없어요... 그런데 저, 그 날 이후로 자꾸 저라는 존재가 옅어져 가는것 같아요... 게다가 제가 하지 않은 일이 제가 했는것처럼 되어 있거나하는 일이 점점 늘어나고 있어요...
그리고 어제는, 자고 있는데 제 옆에 누군가 눕더라구요.. 동생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저와 똑같은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어요.... '이제 곧...'이라고... 그리곤 제 얼굴을 만졌는데 그 손이 약간 차갑긴 했지만 많이 따뜻해져 있었다구요....
저기, 저 어떻게 해야 하죠...?"

(녹음기 꺼지는 소리)


짧은 괴담이지만 도플갱어와 관련된 괴담으로는 가장 좋아하는 괴담이랍니다.
뭐 사실 제 컴퓨터 안에 있는 괴담 중 거의 유일한 도플갱어 괴담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여러분은 도플갱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
그리고 어쩌면 당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지도 모르는 또 다른 자신.

제게 있어서 도플갱어는 아마 일종의 표절이지 않을까 하네요.
마치 표절로 유명한 회사처럼 다른 이들의 것을 모방해 시장에 경쟁 상대라고 누군가가 툭 던져 놓은 그런 것.
어찌보면 상대할 가치도 없고 내 자신을 빼앗을 권리 조차 가지지 못한 것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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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2-01 00:46 | 조회 : 1,108 목록
작가의 말
Beta

문득, 제게 도플갱어가 있다면 원판으로서 미안하단 말을 해 주고 싶기도 하네요,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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