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시작과 처음(5)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드리스의 몸은 산산히 부서져내렸습니다.
부서져내린 조각들은 거센 바람에 부딪혀 돌멩이가 되었고, 그 돌멩이들은 또다시 서로를 산산조각내어
결국에는 가루가 되게 했습니다.



"절대로 잊지 않습니다, 절대로!!"

가루가 된 이드리스는 마지막으로 울부짖음을 내뱉었습니다. 그 가루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다물었고, 입을 다문 지 한참이 되어서야 빛과 어둠은 그들의 입을 열었습니다.


"「코로나 」의 최후는 우리들의 죽음이야. 우리가 바란다면 죽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넌 어떡하고 싶어? 이아나."

빛은 희미하게 웃음을 내보이며 어둠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웃음을 본 어둠은 가슴이 저릿한 것을 느꼈습니다. 참으로 아프게도 사랑스러운 웃음이라고 생각하며.


"난 자신없어."


"......."
어둠은 가만히 바닥을 바라보았습니다. 수많은 잿더미들이 그들을 애워싸고 있었습니다.


"창조를 믿어주지 못한 건 우리야. 우리가 만들었으면서 우리가 신뢰하지 못하고, 모든 마석들을 죽였어. 이드리스가 저렇게 된 건 우리의 무지 때문일지도 몰라."

"그건...!"
어둠은 무슨 말을 하려다 다시 그 말을 삼켰습니다. '잘못은 이드리스가 한 거잖아.' 라고 말하려 했지만 어렴풋이 어둠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빛이 그런 말을 한 것을, 그 말의 의미를.
빛은 그저 '창조가 타락했던 게 아니라 우리가 타락했던 것일지도 몰라. 끝까지 그들의 말을 믿어주지 못했던 우리가.'
라고 말하고 있던 것 뿐이었습니다.


"로지도 죽었어. 그렇게 아름다운 용이. 끝까지 우리에게 피하라면서, 어서 도망치라면서, 숨이 끊기는 순간까지도 우릴 위해줬어. 그런데 나는 그런 로지의 마지막도 지켜봐주지 못했어."
'이젠 로지도 없어.'
빛의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떨렸습니다. 거센 바람을 만난 나뭇잎처럼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이안 넌 다음 생에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했지."

"블로는 마왕이 되고 싶다고 했었고."
빛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아주 자그마한 움직임이었지만 마치 물이 가득 담긴 물잔처럼 물방울이 쉽게 흘러내렸습니다.


빛과 어둠은 손을 마주 잡았습니다. 깍지를 낀 그들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를 더 꼭 잡았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었기에 그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빛과 어둠이 만들어냈던 그들의 세계는 점점 무너져갔습니다. 태양과 달이 떠다니던 하늘에는 금이 가기 시작하고 마치 바람이 빠져버린 풍선처럼, 깨져버린 유리조각처럼 하늘조각은 땅으로 내려가 스며들었습니다.

그들이 발 디딜 곳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들의 모습도 희미해져갔습니다. '코로나' 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어떤 커다란 폭발도 붕괴도 없이, 서서히 연기처럼 스며들듯 사라지는 소멸. 그게 '코로나' 였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존재를 잃어갔습니다.


'난, 마석들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
빛은 잃어가는 존재 속에서 한없이 가라앉았습니다. 어둠이 그 위에서 손을 뻗으며 자신을 꺼내려 했지만 빛을 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어둠의 말대로 그들은 살 수도 있었습니다. 두 번째 창조를 만들 수도 있었고, 가능하다면 드래곤들도 다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망설인 것은 그들의 가치였습니다. 과연 그들이 그런 일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꼭 만나!!"

"-?!"

말할 수 있는 입 마저도 사라져가던 그 때, 어둠이 마지막으로 힘껏 빛을 향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게 다음 생이 됐던 그 다음 생이 됐던..!
꼭 만나자 이아나-!!!"

".....!
물론이야 블로우, 꼭..!
ㄲ.."


그들이 사라지고 난 곳에는 검은 색과 하얀 색의 마력만이 남았습니다. 그들은 다시 마력의 모습으로 돌아간 뒤, 인간계를 향해 떨어져 내려갔습니다.
그렇게 용과 신, 마석들이 살던 그들의 하늘은 사라져버렸고, 높은 곳에는 인간계의 하늘만이 남에 되었습니다. 인간들의 태양과 달이 뜨는 인간들의 푸르고 검은 하늘.


마석으로 변한 태초신이 땅으로 내려가며, 깨졌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아주 단단한 마석이기에 온전할 수도 있고, 충격을 견디지 못해 산산조각 났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들 또한 한 생명체의 몸 속으로 스며들어
두 번째의, 어쩌면 세 번째일 수도, 더 가서 네 번째일 수도 있는.
또 다른 기회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는.




아주 멀고도 먼 옛날의 이야기.






-
-
-
-
-



블로우는 리스펜을 죽였고, 예시카와 아스터, 비비안 그리고 이프 등등 이드리스의 팀이던 이들은 모두 헬리오스의 학생들과 교수들에 의해 패배했다. 그리고 남은 것은 하늘 위에 떠 있는 절반도 되지 않는 수의 드래곤과 이드리스 뿐.


'마력은 그렇게 충분하지 않지만 승산은 있어. 이쪽은 수도 많고 사용할 수 있는 기술도 많으니까. 하지만..'
이아나는 들고 있던 검을 있는대로 움켜쥐었다. 식은땀이 절로 흘러내리는 그녀는 생각조차 제대로 하고 싶지 않았다.

'..학생들과 교수들을 모두 지키면서 싸우는 건 불가능해.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게 되겠지.'
그 누구도 죽이지 않고서 싸움을 끝내고 싶지만, 실질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상대방을 죽여야만 하고, 아군 또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빙설의 마녀는 드래곤들을 죽이기 위해 운명의 시간을 바치는 마법을 썼고, 그 대가로 그녀는 죽었다. 그렇게 빙설의 힘은 레노아에게로 넘어갔지만 이제 막 마녀가 된 그녀는 마력이 불안정했다.
리더시스는 리스펜이 죽은 것과 그를 죽인 것이 바로 루드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엘과 린, 미림도 모두 다른 이들과 싸우느라 체력도 소모하고 상처도 많았다.
뮬과 일리아는 이프를 상대하느라 기진맥진이었고.

거대한 방어막을 만들어 학생들을 지킨 이아나, 리스펜과 대치중이던 블로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나마 그 둘은 기존에 지닌 마력량이 많아서 나은 것이었다.


'하는 수 없어. 우리가 선제공격을 해야 해.'
'공격은 일격에 끝내는 게 충격이 적어.'
이아나와 블로우는 눈빛으로 생각을 전달했다. 자세히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지금 당장 방어막 밖으로 나가서 이드리스를 공격해야 한다는 것은 전달이 되었다.


"좋습니다."

블로우는 크게 쉼호흡을 한 두번 했다. 그리고는 마력을 담아 모든 이가 들을 수 있게 소리쳤다.

"제가 신호를 보내면 모두 드래곤들을 공격합니다. 그러니 어서 이 쪽으로 오십시오!!!!"
"리더시스, 카밀리, 린, 이엘, 디오. 모두 마력이 남아있다면 도와ㅈ-"



콰아앙-!!!!!



이안 또한 블로우와 함께 소리쳤다. 평소에 함께 다니던 친구들이 괜찮다면 자신들을 좀 도와달라고 얘기하려고 했다.
이드리스가 그들을 먼저 공격하려고 단단한 방어막을 뚫지만 않았다면 끝까지 말했을 것이다.



"-!!!!
방어막이 뚫렸어....!"


"-뭘 멍하니 보고 있어?! 어서 가야하잖아!"
이엘은 굉음이 들린 방어막 주변을 향해 뛰며 미림이를 불렀다.

미림은 뒤늦게 그들을 뒤따라가려다 다시 고개를 한 번 돌려보았다. 그곳에는 리더시스가 아직까지도 멍한 눈빛을 한 채 주저앉아있었다. 그에게는 일어설 힘조차 없었다.


미림은 조용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몸을 숙여 그에게 시선을 맞추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리더시스 씨, 정신 차리세요.
친구를 구해야하잖아요. 루드와 리나를 도와야해요!!"


"그래 리더시스. 또 무언갈 잃을 수는 없잖아?"
옆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난 린이 리더시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힘들다면, 혼자라서 자신이 없다면 우리와 함께 가면 돼.'
린의 눈동자가 그렇게 리더시스에게 말을 걸었다.

"......."
리더시스는 아무 말 없이 뒤를 한 번 돌아보았다. 푸른 색의 피가 솟구치던 리스펜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미동도 없었다. 조용히 차가운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푸른 꽃잎으로 뒤덮여있었다.


"...가자."
리더시스가 린의 손을 잡고 벌떡 일어났다. 그간 멍하니 있던 눈빛과는 사뭇 다른 기세였다.


"늦지는 않았겠지..?"

힘차게 달릴 준비를 하는 리더시스의 팔목을 거세게 잡아끈 카밀리는 소리쳤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
-




"젠장할-!!!
블로우, 순서 뺏겼어!"

이아나는 속으로 욕을 한바탕 퍼부었다.
이미 쇠약해져있었다고 해도 방어막은 방어막이다. 무언가로부터 우리를 방어하기 위해서 이아나가 많은 양의 마력을 넣어 만든 것인데, 그것이 일격에 이드리스에 의해 깨진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어서 공격해!!!"
블로우는 그렇게 소리치며 자신도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런...!"
이아나는 쪼개진 방어막의 마력 사이로 최대한의 빛을 모았다.


방어막이 파괴되면서 생겨난 흙먼지들이 걷히자마자 혹은 그것보다 더 일찍 이드리스는 나타날 것이고, 그렇다면 그들은 바로 공격을 취할 준비를 해야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이드리스가 방어막을 깬 지 1초도 되지 않아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휘잉- 거리는 사막의 밤공기가 들렸다. 침식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결코 따뜻하지 않았다. 밤이 되면 한순간에 식어버리는 사막의 바람처럼 사람의 뼛속까지 시리게 만들었다.

바람이 한층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었지만,


"뭐야. 어디 있어?"

이드리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라졌어.."

모래바람이 걷히고 나서도.


그에 일제히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 시작했다.
'뭐야, 도망간 거야?'
'순백의 마법사와 검은 마법사님께 죽을까봐...?'
'그럴 거였다면 애초에 싸우려고 오지도 않았겠지!'
'맞아. 아직까지도 하늘에는 많은 드래곤들이..'


"어...?"
이아나는 한 군중의 목소리에 응답하듯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블로우도 하늘을 바라보았다.
"...뭐야."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버린 하늘은 밝은 달이 뜬 밤하늘이었다. 떠 있는 것은 그 달 뿐이었다.
북적거리던 드래곤들은 한 마리도 남지 않은 채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되면 곤란해, 공격을 퍼부을 때 범위를 설정할 수가 없잖아..'
이아나와 블로우의 표정이 동시에 어두워졌다. 그들이 그간 연습해온 공격들은 모두 일정한 범위를 설정해야만 하는 공격들이었다. 하지만 드래곤들이 모두 없어진 이 상황속에서는 범위를 설정하지 못하니, 공격도 할 수 없다는 뜻.


"..손발이 묶인 거나 다름없네."

블로우가 나지막히 중얼거리던 때였다.



"루드 씨, 리나 씨!!"
"미림아!"
미림이를 포함한 아이들이 모두 이안과 블로가 서 있는 곳 근처로 도착했다. 블로우는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
"괜찮아. 마력을 많이 소모하긴 했는데 그래도 도움은 될 거야."

".....다행이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담담하고 차가운 이엘의 모습은 지쳐보였지만, 지친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에 블로우는 감사함을 느꼈다. 모두가 아직까지는 무사하다는 사실이 이안과 블로의 짐을 덜어주는 듯 했다.


"....."
이아나 또한 잠깐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시름 놓았다는 의미였다.




"전부 고개 숙여라-!!!!!"



레노아의 고함소리.


콰아앙-!!!!!!



땅이 흔들리며 붕괴되는 소리.




".....어?"


이게 어찌된 일인지 영문을 모른다는 디오의 작은 소리.


이것들이 들리기 전까지 그들은 괜찮았다.

3
이번 화 신고 2019-07-20 10:52 | 조회 : 1,814 목록
작가의 말
화사한 잿빛얼굴

후후..안즈 유료분 다 질렀답니다 완전 재밌습니다..후회 안 한다 진짜

후원할캐시
12시간 내 캐시 : 5,135
이미지 첨부

비밀메시지 : 작가님만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익명후원 : 독자와 작가에게 아이디를 노출 하지 않습니다.

※후원수수료는 현재 0%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