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여우비(3)

비가 내린다는 의미는 되돌릴 수 없다는 의미.
생과 사의 경계에서 마력에게 빌었기에 4대와 5대 힘이 된 뮬 그레이스와는 다른 케이스.
수명을 대가로 발동시키는 마법에 죽지 않을 가능성은 제로.

그러니 지금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빗방울을 멈추게 하는 방법은 없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



바로-



'마녀 계승식?'
'응.'
'그건 그냥 보여주기인 거야. 그 전에 이미 능력을 내주고 그 날 공식적인 발표를 하는 거지. 계승식을 안 하는 경우도 있는 걸?'
'그럼 세실이랑 리치카는 어떻게 능력을 받게 됐어?'

'난 학교에서 전대의 주먹을 맞고도 죽지 않아서 계승받았어. 생각해보면 진짜 어이없는 이유인데 그 때는 너무 아파서 그런 생각도 안 들더라.'
'세실은?'
'응?
..나는......'



-
-
-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윤회하는 것이 아닐까, 환생하고 또 환생하여 끝 없이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전생의 나는 어떤 생명이었을까?

-하고 고민하던 때가 있었다.
정말 우습기 짝이 없는 한심한 고민이었다.
차라리 전생의 나는 알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예전에 이프와 함께 침식의 마물을 상대하러 갔을 때였다.
어째서인지 날이 선 초승달을 바라보자 몸 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감정뭉치들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분노, 슬픔과 같은 원초적인 감정부터 시작해
원망, 두려움, 그리움.
토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이드리스와 싸우며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때 느낀 감정은 모두 전생에 내가 느낀 감정이었다.
파인더라는 말이 미친 소리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어떻게 알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메르디스가 말했던 '필살기' 즉 전생의 내가 사용하던 힘을 끌어오고 나서부터는 머릿속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기억들이 들어왔다.

그리고 들어온 기억은 총 두 개였다.


하나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평범한 마을의 평범한 집에서 빛의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 이드리스를 부활시키는 의식 속 주요재물로 바쳐진 가여운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가까스로 의식에서 도망쳐 한 마을에서 살게 되었지만 남은 가족은 없고, 마을 사람들에게서조차도 사랑받지 못하다, 나의 어머니. 에리카 탄을 만난다.

소녀는 어떠한 연유로 에리카를 증오하게 되고 그녀의 뱃 속에 있던 나에게 자신의 빛을 심어두고는 죽어버린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빛의 능력을 가진 저주스러운 아이
「이아나 벨리디움」이 탄생한다.


이유는 모르지만 나는 이 전생의 기억에 침식당하지 않았다.
예상에 불과하지만, 나의 '필살기' 가 전생의 것이 아닌 '전전생' 의 것이기에 그렇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루드 오빠보다 더 늦게 필살기를 쓸 수 있게 된 이유도 전생보다야 전전생이 훨씬 더 이전의 일이니까 그렇지 않을까.



"리즈 님, 리즈 님..."

빙설이 눈 앞에서 죽어가고 있다.
그녀는 날 진심으로 증오했고 진심으로 사과했으며 나는 사과를 받아주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 '리나 크리시' 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는 빙설의 사과를 받아선 안 된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빛」과 「어둠」이라는 능력은 저주라고 낙인찍히게 된 근원이니까.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건 나의 잘못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것도 전전생의 힘을 사용하게 되며
그때의 나에게 침식되어가는 것의 부작용이려나.



"-이아나."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블로."
블로우였다.

나는 나를 향해 뛰어오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몰래 닦고 있었지만 나는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몰래 하려면 다가오기 전에 했어야지, 오면서 닦으면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블로우는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보다 블로우가 나에게 온다는 것은,

"이겼구나."
"응."
리스펜과의 싸움에서 그를 죽였다는 뜻이었다.
블로우는 나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왠지 예전과는 다른 이상한 어색함이 우리의 사이를 메꾸었다.


"...블로.
혹ㅅ-"


콰앙-!


블로우에게 무슨 말을 꺼내려던 순간 하나의 폭발음이 내 입을 가로막았다.
소리가 난 곳으로 빠르게 시선을 옮기자, 그곳에는 레노아가 서 있었다.


"켈른제국민으로써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전부 죽여버리겠어."
레노아는 반짝거리는 얼음을 손에 가득 쥐고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분명 그녀의 능력은 얼음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 상황은..

'..3대 빙설은 그녀인가.'
이제 확실히 2대 빙설 리즈는 죽은 사람이 된 것이다. 그녀의 능력은 켈른의 황녀인 레노아에게 넘겨주고서.


"....잠깐."
나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당황스러움에 입 밖으로 튀어나와버린 말이었다.
블로우는 당황한 듯한 나의 목소리를 듣고 내게 고개를 돌리는 듯 했다. 그리고 이내 내가 바라보는 곳이 레노아가 서 있는 곳이며, 그녀가 방어막을 뚫고는 드래곤들을 향해 걸어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멍청한 짓을....!"
블로우가 깜짝 놀라며 그녀를 향해 달려가려고 하던 찰나
따뜻하고도 포근한 바람이 그의 머리를 쓸며 옆으로 지나갔다.


"죽고 싶으신가요. 황녀님."
그 바람의 주인공은 「나」였다.
나는 이미 뚫려버린 방어막의 앞에 서 있는 레노아의 몸을 꼭 붙잡았다.


"이거 놔라!!"
레노아는 나의 손을 뿌리치려고 온 몸을 비틀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 손의 강한 악력이 그녀의 몸을 놓치지 않도록 세게 붙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노아는 계속해서 몸부림쳤다.

그것이 내게서 벗어나기 위한 것인지 그저 괴로움에 의한 것인지 약간 헷갈리기는 했지만.



"리즈 님이 돌아가셨다, 손 놓고 있었던 주제에-"


짜악.


나의 얇고 새하얀 손이 레노아의 얼굴을 강하게 훑고 지나갔다.

"죽으려면 너 혼자만 죽어.
다른 사람이 말려들게 하지 말라고."

내 입에서 흘러나온 독설이 레노아의 가슴에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다. 잠시 머리를 맞은 듯한 얼굴을 한 레노아는 말이 없었다.
무언가 고민하면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아마,

'..그래. 분명 리즈 님은 내가 이런 짓을 하라고 능력을 넘겨주신 게 아닐거야. 진정해, 레노아.'
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상황에서 뺨을 때린 이를 탓했겠지만 레노아는 꽤나 상황판단이 빠른 사람이다. 이쯤했으면 내 의도를 눈치챘음이 분명했다.

레노아가 복수를 하기 위해 방어막을 뚫어버리는 행위는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것이다.
능력을 받은지 얼마되지 않은 때에는 1차각성도 하지 않은, 그저 빙설의 능력을 사용할 줄 아는 여자에 불과하다.
그 상태로 싸우러 가는 건 죽는다는 뜻이니 자살행위이지.

물론 나나 블로우도, 빙설이 하룻밤에 두 번씩이나 교체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
레노아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두 눈을 감았다. 바둥대던 몸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낀 나는 그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레노아의 몸에서 손을 뗀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소나기가 쏟아져내릴 것 같던 하늘의 먹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끝비가 물러나려는 것이었다.


'여우비' 라는 것은 맑은 날 잠시 내렸다가 그치는 비이다.
지금은 어두컴컴한 새벽의 밤하늘이지만 아마 이 날이 낮이었다면, 이 비는 여우비였겠지.



"들어가있으세요. 섣불리 나서다간 죽습니다."
나는 레노아를 도로 방어막의 안으로 집어넣었다. 방어막의 두께가 방금 전보다 절반 정도로 줄어든 것을 보아 지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레노아는 내 말을 듣고는 기분이 좋아보이지는 않았지만, 기분을 상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닌 진실이라는 걸 알았는지 잠자코 있었다.


뚫려버린 방어막의 자리가 쓸쓸해보였다.
그 앞을 가로막고 이드리스를 바라보았다. 어느샌가 블로우도 내 옆에 같이 서 있었다.

이드리스는 다른 드래곤의 시체를 앞에 들고서는 나와 블로우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에 두려움이 서려있는 것이 느껴졌다.

방어막을 다시 만들만한 마력량은 충분하지 않다. 그걸 만들어버리면 그녀를 상대할 수 없다.
나는 부서진 부분만을 메꾸어놓았다.


이게 마지막 싸움이 될 것이다, 이드리스에게 있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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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루드는 알 수 없는 두통을 겪었다.
그게 언제부터인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예상하건대 자신이 마물들의 「왕」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때부터였던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인정한 후로는 두통따위는 싹 가셨다.


블로우는 마지막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언제까지나 나는 인간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굳게 믿어왔기에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필살기를, 강한 공격을 하면 할 수록, 탑에서 메르디스와 연습을 하면서도 계속 기억났다.
마계에서 지내던 소소한 추억부터 마왕의 영혼이 루드 센티아에게로 들어오는 기억까지.

그랬기에 루드는 인정했다.
알 수 없는 굉장한 마력도, 마법에 대한 재능도, 각성하면 180도로 변해버리는 모습들도 전부 다.

'진짜 「나」가 아니었던 거야...!'



이제는 모든 것을 안다.
그리고 동시에 궁금해져오기 시작한다.

전생이 있다면 그 전생의 전생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그 전전생에서 무엇을 하던 누구였을까. 인간은 맞았을까-

하고.



-
-
-




"다들 괜찮아?"

디오는 멍한 눈빛의 리더시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엉겁결에 디오의 손을 잡았지만 시선은 오로지 그 뒤를 향해있었다.
바로, 리스펜의 시신이 있는 자리.

"죽었어 이미."
디오는 리더시스의 시선을 알아채고 재빨리 대답했다.
리스펜의 몸에서 푸른 피가 흘러나와 바닥을 물들이고 있었다.


'..분명..
멈칫했어..'
리더시스는 아까 전 리스펜의 행동을 생각했다.
완전히 용으로 변해버린 리스펜을 기억해내자 그를 죽이기를 주춤하던 리스펜.
분명 리스펜도 리더시스 자신을 죽이기를 완전히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리더시스는 확신했다.


"....리더시스 씨, 괜찮으세요?"
미림이가 리더시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리더시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미림이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지만, 그가 울고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알 수 있었다.

마지막이야 어찌되었던 간에 리스펜은 십 년을 넘게 함께 있던 가족이었으니.


"......."
"리더시스..."
린과 이엘은 그의 쓸쓸한 뒷모습과 죽어버린 리스펜 교수의 모습을 보고는 입을 도로 닫아버렸다. 이 상황에서는 그저 어떤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답 같았다.
그들에게는 리스펜이 적이겠지만 리더시스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테니까.



쾅-!!!!



"저, 저기 얘들아..
저기 좀 봐줄래.....?"

폭발음이 울리고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카밀리가 입을 열었다.
그녀가 굉음이 난 곳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가르키자 아이들은 모두 그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너무 멀어서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대신해 미림이는 충격이 일은 곳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충격적이라는 듯이 말했다.


"방어막이, 뚫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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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3-04 07:24 | 조회 : 1,794 목록
작가의 말
화사한 잿빛얼굴

오늘 입학식이랍니다! 후하후하 완죤 떨려.. 아참 그리고 완결까지 10편남짓인 거 같아요~외전 하나 생각해두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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