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뱀(02)

…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믿을 수 없었던 것인지. 언제부터인가 당신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지.

그래, 유반이 동료들과 함께 푸른 뱀을 퇴치하러 떠나고 혼자서 살아 돌아온 그날 이후로.

사실 당신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다고 해도 내게 문제가 될 건 없었어. 당신은 여전히 내 연인이고, 내 가족이고, 내 친구인,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내 편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었으니까. 오히려 당신이 더 이상 퇴마사의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더는 그런 목숨이 위험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그래서 더 좋아했을지도 몰라.

흘러 넘치는 정의감에 제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고 오로지 남을 위해서만 희생을 하던, 홀로 남겨질 자신만을 바라보던 연인을 생각하지 않았던 그 때의 당신과는 달라서 안심하고 있었어.

그래서 더더욱 모른 척하려고 했어. 더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어.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처음부터 확신할 수 있었는데.

당신이 유반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그 날, 나를 찾아왔던 당신은 아마도 내가 가장 바라던 모습의 당신. 내가 그랬던 것 처럼 나 하나만을 바라봐주는 그런 당신을 원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비참한 기분이 드는지.


“유반, 자네 정말로 퇴마사의 일을 그만 두겠다는 건가?! 자네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만 둘거야.”

“하, 정말 이해가 안가네. 자네가 얼마나 정의감이 투철하던 놈이었는데. 지금도 많은 요괴들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어. 자네가 그랬지 않았나. 그 능력을 가지게 된 건, 자네보다 약한 이들을 위해 노력해라는 의미라고.”

“…… 글쎄.”

“…………”

“기억안나.”


… 그래, 기억도 안나겠지. 당신은 유반이 아니니까.

나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당신이 유반이라고 믿으려고 했던걸까…….




*




“유반, 설마 소문이 사실인가?”

“무슨 소문?”

“… 흠흠, 자네가 저 여우같은 것 한테 홀렸다는 소문.”


혹시라도 내가 들을까 싶어 목을 가다듬고 소리를 낮춰 말해보려고 했지만 그래도 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이전에도 유반과 함께 퇴마사로서 요괴들을 몇 번이나 퇴치했던 유반 만큼이나 유명한 퇴마사였다. 그리고 유반의 동료들이 그랬듯이, 나를 유반에게 들러붙어 사는 기생충 정도로 생각하고 경멸하는 눈빛을 보내는 사람이었다.


“… 뭐?”

“아니, 그렇지 않는가. 자네 저놈이랑 같이 있으면 아주 얼굴이 물에 물감 뿌리는 것처럼 풀려가지고 헬렐레~ 하는 모습을 모르는 퇴마사가 있는 줄 아는가? 숨기려면 제대로 숨겼어야지. 자네 둘이 사귄다는건 이미 다 아는 사실이라고.”

“…….”

“보아하니 저놈 밤기술이 대단해서 쑥맥인 자네가 홀라당 넘어간 거겠지. 남색이라니,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그래도 자네는 능력도 뛰어나니 잠깐의 일탈로 봐줄 수 있어. 그러니 하는 말이네. 당장 저걸 갖다 버리게. 지금도 보게나. 분명히 저 녀석이 나가서 퇴마일을 하지말라고 뜯어 말렸지? 그러니 나오지 않는게야. 아니 그런가.”

“…….”

“왜, 밀어내면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고 재주 하나 없는 저 녀석이 밖에서 굶어 죽을 것 같나? 그래서 걱정되는게야?”

“…… 죽는다고?”

“걱정 마시게. 밖에 나간다고 해서 전부 다 죽는 것도 아니고 정 상황이 안 좋으면 저 잘난 밤기술이라도 써서 몸이라도 팔면서 살겠 ? 커헉-!!”


오싹하니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마주 선 벽에 무언가가 뿌려진 것 같아 바라보았다. 검붉은 색의 탁한 물 자국. 피였다.


“으, 으, 으아..-읍”

“쉿, 조용히 해야지, 유온.”


그가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내 뒤로 와서 입을 막았다. 여기서 소리를 지르면 깜짝 놀라서 잠시 밖에 보내 놨던 퇴마사들이 집으로 뛰어들어올 것이다.

그의 손에 묻은 진득한 피 비릿내가 콧속을 이리저리 헤집어 다녔다. 역한 향에 토기가 올라왔지만 입을 막은 그가, 내 눈과 마주친 세로로 가늘게 갈라진 눈동자가 너무 두려워서 차마 토가 올라오지도 못했다. 달달 떠는 내가 가만히 있자 그는 눈을 접어 올리며 다정하게 말했다.


“잘했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씩 멀어져 가는 뒷모습이 푸른 한기로 점점 가려져 가고 있었다. 집 밖으로 나가는 문이 열리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약간의 비명소리가 들렸으나 얼마 가지 않아 그 소리들은 들리지 않았다.

온 몸이 얼어버려 꼼짝할 수 없었다. 겨우겨우 자리에서 기어서 나갔다. 그러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머리가 터지고 배가 터져버린 시체 한구. 나는 이 자를 잘 알고 있다. 언제나 나를 경멸한다는 눈으로 내려다 봤지만 유반에게 만큼은 둘도 없는 친구였다. 동료들 중에서 가장 마음이 잘 맞고 합도 잘 맞는 평생친구라는게 이런 거구나 ? 하고 유반이 내게 말할 정도로 서로를 아끼던 친구들이었다. 잠시 봤던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동료들도 그랬다. 유반과 함께 세계에서 날뛰는 요괴들을 퇴치하고 다니면서 우정을 돈독히 했던, 동료로서의 우애를 견고하게 쌓아 올렸던 그런 사람들이었다.

나는 언제까지 모른 척 할 수 있을까.

아니야, 유반이 그럴 리 없잖아.

이러다가 유반이 저 마을의 사람들 까지 전부 죽여버리면 어떡해?

유반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잖아.

내 눈앞에 죽은 사람이, 죽은 시체가, 그나마 마음을 줄 수 있었던 마을 사람들이라면…

유반은 내 연인이잖아. 유반은 훌륭한 퇴마사잖아. 유반은 늘 정의감이 넘치고 또…

나는 과연 그걸 모른 척 할 수 있을까?

‘유반’은……


“유온.”


찬 바람이 싸늘하게 집 안을 메꾸었다. 지금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유반’이 그렇게나 아끼던 옷이었다. 부모님이 처음으로 정식 퇴마사가 된 유반에게 선물해준 옷으로, 유반의 삶에서 가장 의미 있는 옷이라고 그랬다. 그런 옷인데 피가 흥건하게 묻어버렸다.


“왜 그러고 있어?”


지금은 내 얼굴을 보지 못하지만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허망하고, 모든 게 다 부질없는 내가 지을 수 있는 표정.


“… 뭐야.”


그가 인상을 아주 약간 찌푸렸다. 함께 하던 두 달간 단 한번도 보여주지 않은 표정이었는데. 이렇게 보게 되었네. 그는 성큼성큼 내게 다가와 거친 손길로 내 양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힘 없이 그의 손길에 따라 일으켜졌다. 휘청거리는 내 하체에 겨우 힘을 주고 서 있게 되자 그는 여전히 내 어깨를 잡고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물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데?”

“… 당신, 당신 말야…”


아니야,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저렇게 유반이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어디 있다고. 저런 목소리를 내고, 저런 눈매를 가지고, 저렇게… 저렇게……


“유반이 아니죠?”

“…….”

“말… 해줘요. 당신, 당신 정말 유반이 아니에요?”


목소리가 마구 흔들렸다. 마치 거대한 태풍 속에서 피어난 작은 민들레 꽃처럼. 끊임없이 흔들리는 목소리에도 멈출 수 없었다. 두 손을 꽉 쥐고 내 양 어깨에서 손을 때고 뒤로 물러나는 그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며 물었다. 눈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턱에 뭔가가 매달려서 툭 떨어지는 느낌이 났다. 아,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구나.


“… 다 알면서, 지금 와서 물어보는거야?”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칼처럼 꽂혔다. 심장이 비수로 찔린다는게 이른 느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그, 그게 무슨… 하, 하하…… 아니죠? 아니죠…? 당신이 왜 유반이 아닌데에… 그 얼굴을 한 당신이 어떻게 유반이 아니에요…?”


이제와서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그는 가장 친했던 친우를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죽인 자이지만, 어쩌면 저 밖의 동료들도 눈 깜짝할 새에 죽여버렸을 잔인한 사람이지만, 가장 사랑한 사람을, 내 전부였던 유반이 사라졌을지도 모른 내게 두려움은 없었다. 내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것은 유반을 잃는 것이었으니까.

그는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다가 내 손목을 쥐고 집 밖으로 나왔다. 집을 나오자 마자 보게 된 것은 집 앞마당을 가득 메우고 있는 시체들과 사방으로 줄줄 흘러가는 핏물들. 그리고 집 울타리 밖으로 흘러 넘치는 피비린내들이 가득 했다.


“헉…!”

“지금까지 내가 누구를 죽였어도, 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잖아.”

“… 그게 무슨.”

“너에게는 내가 누군지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어떤 형태로든 너의 연인인 ‘유반’이 곁에 있기를 원했잖아. 본질적인 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그가 나를 살며시 안아왔다. 코 끝을 맴도는 서늘한 향기가 피부 구석구석을 파고 들었다. 등 뒤로 감싸드는 그의 손길에는 작은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것 같았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까지고 이런 모습으로 있을게. 언제까지고 네 곁에서…”

“… 당신이… 당신이 ‘유반’이 아니라면…”


처음으로 손을 들었다. 처음으로 그를 밀어냈다. 그는 아주 순순히 밀려 나갔다.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표정을 하고서.


“진짜 ‘유반’은 어디 있는데요?”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눈가가 뜨거웠다. 어쩌면 이미 부어올랐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게 중요하지 않았다. 가슴에서 올라오는 이 뜨거운 열기가, 어쩌면 정말로 ‘유반’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장 현실에 가까운 확신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강물이 거대한 빗줄기를 이기지 못하고 범람하듯 눈물이 미친듯이 쏟아져 내렸다.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이 내 양 볼을 전부 젖어들게 만들었다.


“… 죽었어.”

“…….”

“내가 죽였지.”


아,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말끔해졌다.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리된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머릿속은 새하얬고,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 정말인가요…? 정말로.. 흑, 정말로… 흐윽, 정말로 유반을 죽였어요…?”

“… 그래.”


나는 여전히 ‘유반’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옛날, 유반과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유반이 내게 해 주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누구보다도 강하고, 누구보다도 아름다우며 대륙에서 손꼽히는 가장 오래된 존재. 그렇기에 누구도 그의 정확한 이름을 알지 못하지. 때문에 사람들은 그 보다 더 오래된 전설 속의 괴물의 이름을 따 그를

푸른 뱀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어.’


유반이 가장 잡고 싶어했던 가장 강인하고 가장 아름다운 요괴.


“당신은 정말… 요괴인가요…?

“…….”

“… 당신에겐 그저 재미있는 연인 놀이였을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유반’이 전부였어.”

“…….”

“당신은 ‘유반’이 아니고, 나는 당신의 연인이 아니야.”

“…….”

“그러니까 제발… 당장 사라져.”

“…….”

“끔찍하니까 ‘유반’의 모습으로 날 부르지 마.”

“…….”

“그 눈으로 날 보지 말라고!!”


이젠 지쳤어.

돌이켜보면, 늘 최악의 삶이었다. 사랑했던 가족들은 요괴들에게 모두 잃고, 친했던 친구들마저 요괴놈들에게 모두 잃었지. 복수를 하겠노라 다짐하고 퇴마사가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능력조차 따라주지 않아 퇴마사가 될 수도 없었다. 그 이후로 하던 일은 늘 잘 안되었다. 끝없는 내리막길만 반복되던 인생이었다. 그런 나락의 구렁텅이에서 날 꺼내주었던건 유반이었다.

언제나 상냥하고, 활기차고, 아름답고, 눈부시고, 날 사랑해주던.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내편. 내 사랑. 나의 연인. 하지만 이젠 그런 유반조차도 사라져 버렸다. 어쩜 인생이 이렇게 고달플 수 있을까. 모든 걸 잃어버린 내게 신이 그간의 아픔을 위로라도 해라는 듯 유반을 내게 보내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쩜 한 순간에 나를 떠나버리지.

“하…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웃음이 나왔다. 웃을 수 없는 상황인데도 이렇게 웃음이 나오는 걸 보면 역시 난 미친건가? 모르겠다.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고 싶지 않아.


“… 이제 끝났어?”

“하하, 하…”


지금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그는 날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순간 온 몸이 차가워졌다. 엄습하는 불안감에 뒷걸음질 치자 그는 어느 순간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 검은 머리가 푸르게 변하고, 늘 밖을 돌아다니던 탓에 약간 그을렸던 피부가 창백하게 변해버렸고, 생기가 넘치던 얼굴이 시체보다도 더 싸늘하게 변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걸까 하고 눈을 깜빡이자 ‘유반’이었던 그가 유반과 비슷한 키를 가진 사내로 변했다.


“내가 ‘유반’의 모습으로 있기를 싫어했으니까 바꿨어. 이 모습이 내 본질에 가장 가까우니까.”

“그, 그게 무슨…”

“살면서 이렇게 까지 뭔가를 원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 그거 알아? 집에서 나뒹구는 저 시체가 네가 죽는다는 말을 했을 때 내 안의 뭔가가 떨어지는 것 같았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유온.”

“…….”

“나 아무래도 널 사랑하나봐.”


그가 황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가장 생기넘치고 사랑스러운 표정을 시체보다도 생기가 없는 창백하기 그지없는 저 얼굴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어서, 너무나도 달라서 오히려 더 어울렸다.


“사랑해, 유온.”

5
이번 화 신고 2019-04-03 20:45 | 조회 : 2,488 목록
작가의 말
류화령

ㅋㅋㅋㅋ 저는 이런 찐싸패공도 참 좋아한답니다. 사랑해 유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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