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잊은 자들의 마을(3)

홀로 성 안을 걷고 있는 에르미온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기억을 빼앗은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아이를 맡기고 왔지만 그의 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아이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엘프에 대한 모든 기억들만 빼내어 엘프를 노리고 숲에 들어온 자들이 그 목적을 상실하도록 하는 것이 숲의 이방인들에게 에르미온이 입맞춤을 남기는 이유였다. 어린 아이에 대한 불필요한 동정심은 그로 하여금 아이에게 악몽 같은 기억까지 모두 가져가도록 만들었고, 그 악몽은 결국 그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온다.

기묘한 느낌이 그의 온 몸을 샅샅이 더듬었다. 능력의 부작용이 거대한 지네처럼 살갗을 아프게 찔러온다. 격통이 전신으로 퍼지기 전에 어서 오베론을 만나고 방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 찼다.

걷다 보니 어느새 눈 앞 가까이로 다가온 문은 이상하게도 그에게 너무나도 쉽게 열렸다.

에르미온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방의 주인이 뭔가 피같이 검붉은 색이 칠해져 있는 종이를 소매 안으로 급하게 숨기며 그를 맞았다. 분명 이상하다 느껴질 수도 있는 행동이었지만 그러기에는 그가 보이는 미소가 전혀 이질적이지 않아 에르미온은 그에게 공손하게 읍할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오베론의 입에 걸린 미소가 이질적이지 않다는 것은 그의 착각일 뿐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적절한 판단을 하기에는 이미 그의 눈앞은 흐려진지 오래였다.

“에르? 이런, 상태가...”

눈앞에 있는 자가 자신을 걱정하는 소리는 여름 모기 소리처럼 거슬리게 주위를 맴돌았다. 어쩌면 쓰러지고 있는 것 같은 자신을 받쳐 안는 팔은 꽤 단단했다. 흐려진 눈앞에 구름 속의 달처럼 언뜻 보이는 금발이 비치자 에르미온은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오베론님의 앞에서 그대로 쓰러지다니. 고통에 익숙해진 줄 알았던 에르미온의 몸이 사실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단 한 번의 무리한 능력 사용이 바로 들통내 버렸다.

혼미해지는 정신에도 오베론이 자신을 혹여나 떨어질까 조심스럽게 안고 이동하는 것을 에르미온은 느낄 수 있었다. 오베론이 한발 한발 이동할 때마다 흔들리는 몸이 꼭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시계추 같았다. 고통의 시간을 가리키려 숨 가쁘게 흔들리는 그런 시계추.

매일같이 찾아오는 그 느낌은 평소의 에르미온에게라면 익숙해진 감각이 맞았다. 그것은 하류를 향해 흘러가는 강에 맞닿은 돌멩이와도 같았다. 더욱 아래를 향해 달려가는 강은 돌멩이가 아무리 제 몸에 부딪혀도 익숙해진 흐름에 그저 몸을 맡길 뿐이었다.

중간에 댐을 설치해서 잠시 정지한 채 고인 물은 댐이 터졌을 때 더 빠르게 흘러가기 마련이었지만. 그런 익숙하지 않은 흐름에 강은 반드시 격동한다.

에르미온은 지금 찾아온 격통의 원인이 잠시 중간에 고통을 잊게 해 준 한 요인 때문이라고 직감했다. 그러니까, 정체조차 알 수 없는 한 남자라던지.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던 그의 입술이 이상하리만큼 달콤했다고 에르미온은 느꼈다. 잠시라도 더 그 달콤함에 젖어버린다면 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달콤했던 그 남자도 자신을 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거절해버리기는 했지만.

“그 아이. 이리 넘겨.”

나직하게 들려온 말소리에 자신을 안고 있던 오베론의 발걸음이 굳었다. 에르미온의 위에서 오베론이 작게 코웃음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랄 때는 안 오더니...”

“지금 네가 그 아이한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텐데?”

반 협박조로 말하는 상대에게 오베론이 이상하게도 순순히 에르미온을 그에게 넘겼다. 상대가 누군지 가늠할 새도 없이 에르미온은 혼미해져가는 정신을 그대로 놓았다. 안긴 품속에서 그의 고개가 옆으로 픽 떨구어진다.

소중한 보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에르미온을 끌어안은 남자가 그를 단단히 감쌌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거라는 결심을 단단히 한 듯 겉에서 보기에는 남자가 안은 것이 무엇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남자가 복도의 창문으로 훌쩍 뛰어 올라가더니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바람이 그의 코끝을 채 스치기도 전에 펴진 날개는 에르미온에게 단 한 점의 찬 공기도 허용하지 않았다.

상황을 전혀 모르는 듯 잠들어있는 에르미온의 귀에 속삭이는 남자의 목소리는 설탕이 녹아 흘러내리는 것처럼 달았다.

“제가 필요하면 먼저 불러달라고 했잖아요, 미온.”

루젠이 움직이던 날개를 멈추고 공기를 밟고 서듯 허공에 멈추었다.

살짝 호흡을 가다듬고 그가 고개를 숙여 에르미온의 입술을 탐한다.

고통에 헐떡이던 에르미온의 숨이 잔잔해지자 별이 내리는 듯한 밤하늘에 멈추어 있는 그들은 한순간 시간을 멈추어 버린 듯 고요히 입맞춤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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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2-09 02:21 | 조회 : 980 목록
작가의 말
부드럽게

앞으로 계속 글을 올릴 수 있을지 확실하지가 않아서 서두르다 보니 전개가 급전개가 될 것 같습니다ㅠ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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