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잊은 자들의 마을(2)

재촉하듯 검은 바람처럼 날아가버린 새가 도착한 곳에는 그다지 많은 것이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초록빛 물결을 이루고 있는 숲. 그리고 초록빛 물결 사이에 여린 꽃처럼 서 있는 여자 아이 하나.

그 어린 꽃은 물결에 휩쓸리지 않은 채 그저 순수하게 피어 있었다.

“겨우 어린 아이가 결계를 넘어왔다고...”

아무 것도 모르는 채 순진하게 서 있는 아이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에르미온은 이내 뒷말을 삼켜버렸다. 어차피 그 아이가 설령 갓난아이였다 할지라도 오베론은 자신에게 ‘침입자’를 찾아가라고 했을 것이다. 숲의 보호를 위해서 오베론과 에르미온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다시 바라본 아이가 에르미온을 향해 눈을 반짝였다. 선망에 가득 찬 눈으로 에르미온을 바라보던 아이가 그 짧은 팔을 에르미온을 향해 한껏 뻗었다. 통통하고 작은 손가락이 어떻게든 에르미온에게 닿으려고 애쓰는 듯 했다. 혼자 숲에 남겨져 있는데도 방시레 웃고 있는 아이가 에르미온의 눈에는 왠지 안쓰러워 보였다.

보석 같은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는 아이에게 마음이 동하여 어린 아이를 살짝 안아 올렸다. 숲에 오래 남겨져 있지 않았는지, 몸에 파고드는 아이의 체온은 꽤 따뜻했다. 루젠이 아닌 사람에게서는 오랜만에 느껴 보는 훈훈한 느낌이었다. 잠시 아이를 가만히 안고 있자 안겨 있는 데에 싫증이 났는지 아이가 몸을 뒤로 뻗어 에르미온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요모조모 진지하게 바라보던 아이가 소시지같이 통통한 손가락으로 인간과는 다른 에르미온의 귀를 덥석 잡았다. 에르미온은 그 손을 밀어내지 않는다.

“요정님이에요?”

아이의 말 한마디가 아이가 가지고 있던 선망의 눈빛이 어디서 왔는지 설명해 주었다.

하늘의 별이 사람이 되고 싶어 흘린 눈물이 땅으로 내려온 것이 요정이라고, 바깥의 이야기에서는 전해져 내려온다. 별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한 요정들은 늘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라고, 아이는 알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영원과 맞닿아 있는 존재인 엘프에게 결코 침범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시간이었다. 작은 유리조각처럼 흘러내리는 시간에 사람들은 점점 할퀴어져 가지만 엘프들은 그 유리조각들과 봄비의 다른 점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가끔, 그 유리조각이 가슴에 꽂혀 흘리는 누군가의 피에 슬퍼하기는 했지만.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것은 엘프들에게서 영원을 떼어 낸다면 사람과 같아질 것이라는 거였다. 지나가는 감정, 스쳐가는 손길, 일렁이는 마음은 사람과 똑같이 엘프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단지 지나간 추억들을 곱씹어 볼 시간이 영원이라 규정되어 있는 것 뿐. 엘프들이 대지에 닿지 못하는 별의 슬픔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알았어?”

쓸쓸한 눈으로 힘없이 미소 지으며 에르미온은 아이에게 되물었다. 어떻게 행동하든, 아이의 요정님은 아이의 기억 속에는 결코 남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에르미온은 잘 알고 있었다.

“아빠가 그랬어. 저어기 앞쪽에 숲으로 계속계속 달려가다 보면 귀가 뾰족한 요정님이 나올 거라고. 그러면 그 요정님이 엄마한테 데려다 준다고 했어.”

아이는 에르미온의 귀가 꼭 장난감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말을 끝내고서 잠시 시무룩해진 아이는 오직 귀에만 관심이 있다는 듯 아이는 에르미온의 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점토처럼 조물락거리고 있었다. 귀가 늘어나는 것 같은 당기는 아픔이 미미하게 다가왔지만 에르미온은 굳이 아이의 손을 막지 않았다.

몇 살이나 되었을까. 다섯 살, 아니면 일곱 살? 아이가 자신이 살아온 나이만큼을 수없이 더 먹는다고 해도 에르미온의 나이에 다가올 수는 없을 것이었다. 자신의 삶과 비교하면 찰나조차 되지 않는 순간을 살아온 아이가 하고 있는 생각이 무엇일지, 에르미온은 갈피조차 잡히지 않았다. 종족에서는 아주 어린 축에 속해서 아직 어린 아이 취급을 받기도 하는 그였지만, 아무리 그가 아이 취급을 받는다고 해도 다섯 살 어린 아이를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엄마는 어디에 있는데?”

생각을 읽는다는 간단한 방법이 있지만 왠지 에르미온은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았다. 어차피 읽어야 하는 생각이기는 했지만, 마지막에 마지막으로 남겨 놓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이유는 그 자신도 잘 몰랐다.

“엄마는, 별에 가 있대. 다시 땅으로 못 내려온대. 그런데 아빠는 어른이라서 별에 올라가지 못한다고 나보고 엄마를 데려오라고, 부탁하라고 했어. 아빠는 그동안 엄마 같은 사람을 찾아본다고 했어.”

담담하게 말하는 아이의 말에는 울음이 섞여 있다. 엄마를 떠올리는 것일까. 울음을 애써 참고 있는 것인지, 순진한 것인지 분간이 안가는 아이의 표정에서 에르미온은 문득 과거의 자신을 겹쳐 보았다. 괜히 나쁜 기억을 파헤친 것 같아 에르미온의 얼굴이 미안함에 여리게 찡그려졌다.

“그러면 이제 내가 네 엄마, 데려와 줄게.”

“정말로? 요정님이 데려와 줄 수 있어?”

“그럼, 요정님인걸?”

한 번쯤은 거짓말을 해도 괜찮겠지. 에르미온이 다시 잔잔하게 웃는다. 살짝 손가락을 가져다 댄 아이의 얼굴에서 아이의 기억들이 전해져 왔다. 어린 아이들이 살아온 찰나도, 그 아이들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이면서 힘든 것이었다. 애초에 그것이 그 아이들의 세상의 전부였으니까.

검은 안개처럼 덮쳐 온 병마에 세상을 떠난 아이의 엄마가 하늘 어딘가에 있다는 걸, 그 아이는 꼭 믿고 있었다. 엄마가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딘가에는 있다는 것을 아이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곱씹은 것 같았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해버린 에르미온의 마음이 다가온 아이의 기억에 괜스레 아렸다.

전부 잊는 것이 너에게는 행복할까. 나중에 커서 그 아이가 자신이 아버지에게도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너는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미래를 보는 당신께 버림받은 나는 어쩌면 고통보다도 가끔은 그 사실이 더 아린데.

에르미온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자신의 귀를 만지작거리던 아이의 손을 가만히 밀어 내고 아이의 눈을 살짝 감긴다. 아이의 이마에 천천히 입술만을 가져다 대고서 아이가 기억하는 요정들에 대한 사실과 제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 그리고 그들과의 마지막을 모두 아이에게서 가져갔다. 빛바랜 사진일지라도, 추억이라는 걸 가지고 있는 것이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행복할 수 있는 길일 것이라고 에르미온은 생각했다.

봄꽃같이 화사한 얼굴을 하고서 잠들어버린 아이를 뒤쪽에 있던 병사에게 안겨 주면서 에르미온이 아이에게 나직하게 속삭인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웃을 일만 있기를.”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리석게 바래본다.

아이를 받아든 병사는 익숙하다는 듯이 뒤돌아서 어딘가로 걸어갔다. 굽 있는 신발에 몸이 덜컹거리는데도 곤히 잠든 아이는 깨지 않았다. 숲의 물결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병사를 천천히 뒤따라가는 에르미온의 손끝이 왠지 잘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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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2-05 05:29 | 조회 : 990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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