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미온이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자 차분하게 서 있는 루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창살 너머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루젠의 반응은 마치 집 안에서 아는 사람이 자신을 불렀을 때의 반응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물 위를 걷는 것처럼 고요하고 깨끗하게 루젠이 에르미온에게로 다가왔다. 투박해 보이는 굽이 달린 신발은 지면에 닿으면서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의미를 알 수 없게 우아한 그 움직임은 에르미온의 마음을 꽤나 뒤흔들어 놓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얼굴에 가면을 겹겹이 덧씌우는 것뿐이었다. 에르미온의 표정이 마음에도 없는 냉기를 머금었다.
“굳이 오지 않아도 오늘 밤에 제가 찾아갈 거였는데.”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살얼음이 순식간에 깨져버렸다. 얼음이 녹은 수면이 요동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어떻게 그를 밀어낼지, 그리고 어떻게 그를 붙잡을지. 여러 가지 생각들이 소용돌이가 되어 에르미온의 마음속을 쓸고 지나갔다.
“어제 일은...고마웠지만 다시 볼 일은...”
“없다고는 하지 말아줘요.”
머뭇머뭇 내뱉어지는 말이 어떻게 끝날지 두려워 루젠은 에르미온의 말을 툭 끊어버렸다. 관계가 제대로 엮이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 끈이 잘려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번 관계가 끊기고 나면 어떻게 밀어붙이든 모두가 상처를 받을 것이 확실했다.
루젠이 앞으로 다가서자 차가운 쇠기둥이 그를 가로막았다. 그를 가두고 있는 창살은 이제 그가 전하려는 말조차도 막아서려는 듯 했다. 창살 너머로 보이는 에르미온의 모습이 왠지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답답해졌다.
역시, 거슬려.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는 루젠의 움직임에 맞춰 쇠창살이 눅진하게 휘었다. 둥글게 휘어버린 쇠기둥이 꼭 그곳에 일부러 만들어 놓은 장식품 같았다. 길이면 안 되는 곳에 길이 생겨나자 당황한 에르미온이 뒤로 주춤 물러섰다. 알 수 없는 공포에 질린 작은 움직임은 성큼 다가온 남자의 발걸음에 의해 금방 따라잡혀버린다.
코끝이 스칠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감도는 것은 어색한 침묵뿐이었다. 에르미온의 뒤에 난 창이 루젠의 얼굴로 햇빛을 쏘아댔다. 환하게 빛나는 듯한 루젠 앞에서 그림자에 덮여 있는 에르미온은 자신이 한없이 왜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침묵 속에서 갑자기 루젠의 손이 에르미온에게로 향했다. 불쑥 뻗어져 나온 손은 그 한없이 가까운 거리에서도 허공만을 휘젓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를 어떻게 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을까. 욕망을 억누르는 자책감은 루젠의 마음속을 무겁게 때린다.
“...제가 보기 싫으면 부르지 않아도 괜찮아요.”
의외라는 듯 동그랗게 변한 에르미온의 눈이 루젠의 마음을 한 번 더 무겁게 때렸다. 에르미온에게는 자신이 그저 욕망에 가득 찬 쓰레기로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에 루젠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대신 어디라도 상관없으니까 제가 필요하면 제 이름, 불러주기에요.”
에르미온이 숲의 어디에 있든지, 루젠은 그곳으로 달려갈 자신이 있었다.
단 한 번의 접촉도 없이, 루젠은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고개를 숙인 채 뒤로 휘청이며 걸어가는 그는 꼭 제정신이 아닌 사람 같았다. 다시 원래 있던 방 안으로 돌아간 그의 앞에 쇠기둥이 다시 꼿꼿이 드리운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감옥은 원래와 달라진 점이 전혀 없다. 루젠조차도 몇 분 전에 짓고 있었던 그 웃음을 따라 그린 듯 똑같이 입가에 드리우고 있다.
이렇게 관계를 끊어버리는 편이 낫겠지. 에르미온도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양 몸을 빙글 돌려 바깥으로 단호하게 걸어 나갔다. 어느새 다시 차가워진 얼굴에는 방금 보였던 그 어떤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들어올 때와 꼭 같은 타박타박 소리가 점점 바깥으로 멀어져 갔다.
에르미온이 떠난 자리에 은은하게 남아있는 백합과도 같이 달달한 향기가 루젠의 코끝에서 맴돌았다. 루젠은 그 향기를 기억하려는 듯, 몇 번이고 곱씹어보고만 있었다. 자신이 머릿속에서 맴도는 향기만으로도 그를 찾아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