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미온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햇볕이 눈을 따갑게 찌르고 있을 무렵이었다. 여러 가지 일들에 지쳐 잠드는지도 모르게 까무룩 잠든 것이 틀림없었다. 지쳐서 잠든 것 치고는 몸이 꽤나 가뿐하기는 했지만.
엘프의 왕이라고 해서 아주 깍듯하게 모셔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결코 천대받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왕이 탄생하는 방식이 왕가의 피를 계승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대 왕이 혹여나 사고를 당할 시 그 다음의 아무나에게 무작위로 이어지는 마법이었기 때문에 바깥의 인간 세상처럼 신분의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왕’이라는 것은 그들의 종족을 보전하기 위한 방패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동족의 안위라는 무게는 언제나 에르미온의 목을 짓누르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기에 동족이 아닌 루젠이 그의 영역을 침범한 데에 불쾌감을 크게 느끼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검고 찐득하게 그의 발목을 휘감아 오는 ‘기억들’에 한 줄기 청량한 물이 들이부어진 느낌이었달까.
‘제정신이 아니네. 이런 생각이나 하고.’
그를 보필하는 자들이 그를 단장시키는 동안 수면 위의 안개처럼 머릿속에 피어오른 생각들이 그에게는 그저 어이가 없었다. 자신에게 무슨 속셈이 있는지도 모르는 자에게 호의를 가지다니.
어느새 한줄기 백합처럼 곱게 단장된 그가 바깥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을 때 그에게 다가온 병사가 한 말은 방금 에르미온이 한 생각이 망상이라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듯 했다.
“수장. 간밤에 침입자가 옥 바깥으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서 숲 전역을 수색하고 다녔는데, 오늘 아침에 가보니 감옥 안에 얌전하게 앉아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이지. 이런 일은 그냥 혼자서 해결하란 말이야. 굳이 이름만 수장인 내게 떠맡기지 말고.
병사에게 건네고 싶은 푸념이 목구멍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에르미온은 표정 한 번 바꾸지 않고서 그 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 그런 말을 해보았자 자신에게 이득이 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에르미온은 루젠이 ‘어떻게’ 나갔는지는 잘 몰랐지만 ‘어디로’ 나갔는지는 잘 알고 있었기에, 문제의 해결은 꽤 쉬우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직접 가보겠다. 앞장서거라.”
분명 누군가에게 가보라고 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던지, 병사는 그 명령에 꽤나 놀란 눈치였다. 그렇지만 행동만은 꽤나 빨라서 에르미온에게 방향을 안내하고는 조급한 발걸음으로 뛰는 듯 걸어나갔다. 그가 입고 있는 갑옷의 사슬이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멀리서도 꽤나 잘 들릴 정도였다. 뒤따라가는 에르미온의 얇은 옷소매는 풀잎이 스치는 것보다도 작게 사락거리면서 휘날렸다.
그들이 발을 내디딘 지하 감옥은 꽤 쾌적한 토굴에 가까운 곳이었다. 지하임에도 눈이 부시게 들어오는 햇살이 흙으로 다져진 바닥의 물기를 모두 말려내고 있었다.
에르미온의 눈앞에 온통 푸근한 흙색으로 뒤덮인 감옥이 나타나자 그는 단둘이서 협상을 해보겠다는 명목으로 앞서나가던 병사를 물렸다. 쫓기듯 병사가 바깥으로 나가버리자 익숙한 적막감이 유령처럼 그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왠지 기척을 드러내고 싶어져 에르미온은 부러 타박타박 소리를 내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이제껏 거의 줄곧 비어있던 감옥들에서 나오는 한기가 그의 뺨을 스쳤다. 에르미온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그저 사람이 있는 감옥을 향할 뿐이었다.
일부러 기척을 낸 것이 통한 것인지, 보이지도 않게 멀리 있는 감옥에서 쑤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루젠을 만나는 것이 왠지 긴장되어 에르미온은 쇠로 된 창살을 손끝으로 훝으며 선을 그렸다.
어린아이 때도 하지 않던 행동인데, 어째서 지금 와서 마음이 출렁인다고 정갈하지 못하게 행동하는지 에르미온 자신도 그 이유를 몰랐다. 쌓인 먼지가 묻어 쥐색으로 뿌옇게 된 손끝이 괜스레 부끄러워져 살짝 털고서는 겉으로는 보이지 않게 두 손을 모아버렸다.
다시 빠르게 걷기 시작해 흩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바람이 오갔다. 머리칼이 다시 차분히 내려앉은 것은 몇 걸음 앞의 감옥에서 부드러운 말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오랜만이네요, 미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