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이런 때는 괜찮아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앞으로 더 생길지도 모르는 악연의 싹을 미리 꺾어낼 수 있는 법이건만.
이상하게도 뜨겁게 막혀오던 입에 한 줄기 공기가 들이부어지던 순간 아까까지 에르미온의 몸을 휘감고 있던 고통이 모두 타 없어지는 듯해서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아직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남자의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지 못해도 그것이 만약 자신을 그가 없으면 안 되는 몸으로 만들려는 거라면 성공할지도 모르겠다고, 에르미온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입맞춤이, 그리고 밤이 되어가는데도 더 이상 자신의 머릿속을 침범하지 않는 고통이 그에게는 꽤나 생소하면서도 달콤한 것으로 다가왔기에.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물음에 대답하기에는 왠지 자존심이 상하는 느낌이 들어 에르미온은 말을 돌렸다. 이미 그의 팔에 안겨있는 상황에서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은 왠지 이상한 분위기를 조장할 것 같았다.
“...넌 뭐냐?”
팔에 머리를 대고 있는 채 돌려진 고개. 그리고 그 상태에서 튀어나온 불손한 말투. 꽤나 느닷없는 것이라 루젠은 잠시 당황했지만 그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너 말고 루젠이라고 불러줘요, 에르미온님.”
그 이름은 또 어떻게 들은 건지. 에르미온은 자신이 말해준 적도 없는데 갑자기 남자가 이름을 알고 있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일단 이 자세에서 벗어나야겠어, 라고 생각한 에르미온이 루젠의 가슴을 살짝 밀쳤다. 그의 팔에서 벗어난 에르미온이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하고서 팔짱을 끼었다. 소매가 긴 옷이었는지라 맞닿은 소매에 주름이 생겨 꺼끌꺼끌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 때문에 숲에 들어온 거냐.”
수장이 된 후로부터 입에 붙은 말투. 자신을 높이는 그 말투가 입에 붙은 것은 꽤나 오래된 일이었고, 이제는 그 말투에 에르미온은 위화감조차 느끼지 않았다.
루젠을 올려다보면서 진지한 표정을 짓는 에르미온의 모습에 루젠은 문득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가 숲에 들어온 이유는 그에게는 모래밭의 모래 한 알 만큼이나 중하지 않은 것이었다.
“온 세상을 여행하다 들렀습니다만...?”
루젠은 나름대로 진심이었다. 단지 그가 숨기고 있는 것은 그가 ‘숲’에 들어온 이유가 아니라 세상을 여행한 이유였지만. 그리고 아직은 밝힐 수 없다고 생각해 그는 자신이 세상을 여행한 목적을 숲에서 달성했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답은 에르미온에게는 그저 말도 안되는 거짓말로 들렸다. 숲 안에 들어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소문이 안개가 퍼지듯 스멀스멀 퍼져서 어느새 숲에서 먼 지역에서도 그것을 알고 있건만.
위험한 지역에 굳이 들어오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비슷했다. 엘프를 잡아서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든지, 아니면 간간이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돌아다니다 길을 잃었다든지.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모두 같은 방법으로 처리되고 있었다.
그런데 루젠은 이중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심지어 ‘처리’되기 위한 능력조차 통하지 않는다. 그래도 혹시라도 엘프 사냥꾼일수도 있지, 라는 생각에 에르미온은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었지만.
“...그럼 어떻게 한 거야.”
살짝 우물거리며 말끝을 흐리는 에르미온의 모습이 뭔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꽤나 귀엽게 보인다고, 루젠은 생각했다.
“뭐를요?”
뭔지 다 알고 있으면서 구태여 루젠이 한 번 더 묻는 까닭은 그저 그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다시금 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꽤 불손한 생각이라는 것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런 욕구를 잘 참지 못했다.
“아까... 그... 윽. 그러니까...”
“입맞춤 두 번. 그거 말하는 거예요?”
입맞춤이라는 단어 하나를 내뱉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 더듬거리던 에르미온의 말을 중간에 뚝 잘라먹은 루젠이 제 입술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어차피 자기가 꺼내야 하는 말이었음에도 다시 복사꽃처럼 분홍빛으로 변해버리는 에르미온은 꼭 입맞춤이라는 걸 처음 본 어린아이 같아보였다.
“...그걸로 내 마법이 네게 안 통한 것. 그리고 네가 내 머릿속의 걸 지워버린 걸 말하는 거다.”
붉어졌던 그의 얼굴이 의외로 꽤나 빨리 평정심을 되찾아서 아쉽다고, 루젠은 생각했다. 그래도 해야 할 말은 끝내는 것이 옳으니, 루젠은 간단히 말해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어차피 에르미온은 그것으로 루젠을 계속 필요로 하게 될 것이었다.
“정신계열 공격 무효화. 그걸로 만족해요?”
기억을 읽는 게 불가능했던 것도, 기억을 옮기는 게 불가능했던 것도, 머릿속에 있는 이질적인 것 때문에 생겨났던 고통을 지워버린 것도 그것이면 전부 설명이 된다. 에르미온은 그 능력에 대해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 그것이 다른 능력이라 해도 달리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물어봐야 될 것 같은 기본적인 것들을 물어보고 나니 감도는 침묵이 왠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어느새 어두워진 창에서 들어오는 공기가 꽤 찼다. 침묵 탓인지 찬 공기 탓인지, 등에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달빛만이 들어오는 방 안에서 루젠의 벌꿀색 눈이 형형히 빛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창을 등지고 빙글빙글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왠지 밤의 고양이 같았다.
어색한 침묵을 깨버리려는 듯 루젠이 에르미온에게 한 발짝 다가왔다. 또 무엇일까, 싶어 에르미온 역시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공간적인 제한으로 그의 능력은 쓸 수 없는 상황에서 루젠의 힘은 그가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에르미온보다 훨씬 큰 걸음으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온 루젠이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되어 에르미온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미 이 분위기에서는 루젠은 공포감을 조성하기에 꽤 좋은 존재였다. 왜 진작 등불을 켜놓지 않았을까, 에르미온은 후회감이 들었다.
그러나 에르미온은 괴한처럼 다가와서는, 다시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는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의 눈과 에르미온의 눈높이가 딱 맞아떨어졌다. 분명 아주 작은 키는 아니었음에도 루젠이 허리를 숙여야만 마주치는 에르미온의 키 때문이었다.
“앞으로 저 계속 이 때 오면 되는 건가요?”
의중을 알 수는 없지만 음흉한 속내가 담겨 있는 듯한 질문에 에르미온은 도리질을 쳤다. 달리 그가 왜 오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입맞춤 뿐이었다.
“내가 없으면, 계속 이때 당신이 아플 거잖아.”
분한 일이었지만 사실 지금 이렇게 멀쩡하게 서 있는 것도 그가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었다. 루젠이 한 말이 너무나도 정확히 들어맞아 왠지 에르미온에게 아프게 다가왔다.
하루에 한 번 입맞춤으로 이제껏 지독한 먼지처럼 켜켜이 쌓여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것을 없앨 수 있다면 꽤 남는 장사가 아닐까. 에르미온은 그런 생각으로 어쩌면 루젠이 계속 오는 것이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루젠은 계속 이 숲에 남아있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남은 한 줄기 자존심 탓에 에르미온이 꺼내려던 말은 소리가 지워지고 형태만 남았다. 오직 입모양으로만 전달된 ‘와’라는 말에 계속 에르미온의 얼굴을 지켜보던 루젠이 눈 온 날의 강아지처럼 기뻐하는 것이 보였다.
뭔가 다른 속내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잠시 머물다 금방 사라졌다.
“그럼 계속 볼 사이니까 이제 말 놔도 되나요?”
어두운 중에도 또렷이 보이는 루젠의 미소가 왠지 들뜬 듯이 보였다. 하나를 허락해주니 더욱 기어오르려 하는 루젠의 모습에 에르미온은 어이가 없었다.
“넌 아직 침입자의 신분일 뿐이다. 착각하지 마.”
딱딱하게 나온 말 한마디에 루젠이 왠지 서운한 듯 보여서 에르미온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리고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넌 인간이니 200을 훌쩍 넘긴 나보다는 어리지 않겠느냐?”
비웃는 듯한 말투였다. 그 말을 꺼내자 루젠이 풀이 죽은 듯 시무룩해져서는 말려들어가는 목소리로 대충 대답했다. 그러고서는 다시 창문으로 향한 루젠이 부드러운 몸짓으로 창틀로 올라갔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 떠나려는 것일까, 추측하던 에르미온이 올려다본 루젠은 언제 시무룩했었냐는 듯 이를 드러내고 환히 웃고 있었다.
크게 들어오는 달을 뒤로하고 서있는 루젠이 왠지 달보다 더 빛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 내일 봐요, 미온.”
에르미온이 이름을 줄여 부르지 말라고 대꾸할 틈도 없이 루젠은 그대로 몸을 눕듯이 뒤로 숙이더니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루젠의 입에 미소가 서렸다.
드디어 그를 얻었다는 기쁨이 숨겨지지를 않았다.
“그리고 내가 연상이야, 아가.”
혼잣말을 던지고서 푸흐, 하고 루젠이 웃음을 터뜨렸다.
내일이 꽤나 기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