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목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에 막혀 에르미온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목에서 맴돌던 뜨거운 무언가가 목으로 나오는 것을 포기하고 얼굴로 옮겨갔는지, 얼굴이 미묘하게 화끈거리는 것이 뚜렷이 느껴졌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맴돌던 기분 나쁜 기류는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 채였다.
루젠의 눈에 비친 에르미온의 얼굴은 호수에 비친 별빛이 가지각색으로 빛나는 것 같이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그에게 비추어진 별들 가운데에 루젠이 포함되어 있을지, 그리고 그의 별은 에르미온에게 어떤 의미일지 루젠은 아직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했던 행동을 잠시 되돌아보면서 보일 듯 말 듯 쓴웃음을 꾹 삼킬 뿐이었다.
그래도, 이제는 루젠은 그 행동을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 와있었다. 몸도, 마음도.
문득 다시 바라본 에르미온의 눈에서 검은 실 같은 것들이 뭉쳐져 있는 것 같은 기운이 보였다. 미묘하게 씁쓸하고 기분 나쁜 기운이었다. 숲에서 보았을 때보다 창백한 안색을 하고서는 그의 눈조차도 에르미온이 정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아픈 거구나, 당신이.
가슴에서부터 엷게 퍼져 나가는 아린 느낌에 루젠은 제 왼손을 가슴 앞으로 살짝 올렸다. 아프게 뛰고 있는 심장이 혹여나 보여질까 싶어 가만히 올린 왼손을 심장 앞에 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기억도 안 나는 옛날 누군가에게 들은 기억이 있다. 그 이야기가 맞다면 삶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상대에게 느끼는 감정이 위험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는 그 감정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기묘한 자세로 손을 올린 채 멍하니 있는 루젠을 이상한 듯 바라보던 에르미온이 그에게 무어라 말을 걸려 하는 듯 했다. 말을 하려는 듯이 입을 살짝 벌리고 루젠을 바라보는 에르미온에게서 흘러나오는 분홍빛 향기에 루젠은 홀린 듯 눈앞의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이내 거두어들였다.
앞으로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면 아직은 그에게 손을 뻗을 때가 아니었다.
루젠의 얼굴에 왠지 슬퍼 보이는 눈웃음이 걸렸다.
“왜 혼자 다 삼키고 있어요.”
분명 의문문이어야 할 텐데 끝이 기운 없이 처진 말이었는데도 그 말은 에르미온의 등을 얼음으로 만든 칼처럼 오싹하게 긋고 지나갔다.
무엇을 삼키고 있다는 말일까. 누군가의 기억들, 아니면 그저 고통? 아니면 그 둘 다? 어느 쪽을 눈치 채었든지, 그 사실을 눈치 챘다는 것 자체로 소름이 오소소 돋는 듯 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에르미온의 쪽으로 루젠이 조심스레 한 발짝을 떼었다. 내딛은 발걸음에 떠오르는 모든 잡생각들을 떨쳐 버리려는 듯 루젠은 길게 호흡을 내쉬었다.
답이 떠오르지 않는 여러 가지 망상들과는 다르게, 루젠이 에르미온의 고통을 덮을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가만히 서있는 에르미온을 끌어안자, 놀란 아기새처럼 뛰고 있는 심장의 고동이 루젠에게 와 닿았다. 부드럽지만 강한 움직임이었기에, 잠시 흠칫하던 에르미온은 루젠을 밀어내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머뭇거리며 내린 고개에 눈빛이 마주하자, 루젠은 이끌리듯이 제 입술을 에르미온의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살며시 들어 올려진 루젠의 오른손은 에르미온의 흰 뺨에 가 닿았다.
자신을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그를 소유하고 싶다는 감정이 둘러싸인 아름답지만은 않은 감정이라고 해도 루젠은 상관없었다.
이미 에르미온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의 세계의 중심은 자신이 아니게 되어버렸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