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윽.”
목석처럼 굳어진 채 한참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고개를 돌리자니 목의 한 점에서 찌릿거리는 느낌이 퍼져나가는 듯 했다. 기분 나쁜 통증에 에르미온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자의와는 상관없이 입에서 나오는 낯선 소리에 새삼스럽게 놀란 그는 흰 손가락 하나를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언제나, 는 아니라도 꽤 자주 나는 소리였지만, 언젠가는 그것이 꽤나 원망스러울 때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바로 아까 있었던 침입자와의 일이라든지.
그렇게 그에게 오래 붙잡혀 있었으니 마렌이 궁금해 하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오랜 벗인 마렌은 이제껏 이런 광경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오래된 연인이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이어진 입맞춤을 다시 생각하니 왠지 솟구쳐 오르는 짜증과 알 수 없는 느낌에 에르미온의 얼굴에 잠시 분홍빛이 스쳐갔다.
그의 혀가 자신의 입에 들어오기까지 그가 한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살갗이 제 살갗에 아주 약간이라도 닿았음에도 생각이 전혀 읽히지 않은 상대는 그가 처음이었고, 그에 따라 에르미온은 그 원인을 이제껏 읽어왔던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서 찾아야 했다.
늘 생각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떠올리는 것은 꽤나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의 경계선을 팽팽하게 유지하면서 그들의 생각을 슬쩍 엿본다. 만약 그 생각이 한 방울이라도 선 안에 들어왔다가는 맑은 물속에 떨어진 물감 한 방울이 점점이 퍼지듯 곧 자신의 일부가 될 것이었다. 에르미온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슬쩍 엿본 생각들 중 남자들이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던 생각들은 꽤나 다양했다.
긴 은발에 길고 흰 속눈썹, 얇은 골격을 가진 그를 여자로 착각하던 시선들. 아니면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성별에 상관없이 난생 처음 보는 엘프라는 종족의 아름다움에 미혹된 시선들이 대다수를 차지했지만 왠지 ‘그’가 자신을 바라본 시선은 그런 것들과는 왠지 차이가 있는 듯 했다.
본래 자기 스스로에게 미혹당하는 이유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 내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거나, 불가능한 일인 법이다. 이제껏 살아온 생애동안 자신을 바라보고 살아왔고, 반하지 않았건만 이제 와서 갑자기 사랑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에르미온은 자기 자신을 때때로 자신이 품에 안는 강아지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시간은 무의미한 고민을 계속하는 동안 끊임없이 흘러갔다. 아까까지 쳐다보고 있었던 태양은 저 위쪽에 있어 깃펜에 주황색 잉크를 묻혀 하늘색 종이에 톡 떨어뜨린 것처럼 보였는데, 어느새 태양빛은 그 주황색 잉크를 온통 방에 흘려보내고 있었다.
시간을 자각하니 갑자기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윙윙 울리는 것 같았다. 늘 자신과 함께하는 익숙하지만 무언가 입속에 쓴 것을 머금은 듯한 고통과 불쾌감 사이에 있는 느낌이 온 몸을 뒤덮었다. 종족의 수장이 된 이후로 늘 겪는 일이었지만 언제 겪어도 기분이 나빴다.
비틀거리며 빛이 새어나오는 창가로 가까이 다가간 에르미온은 창문이 없는 창틀을 붙잡고 기대어 섰다. 엘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정화와 같은 요소들을 포함한 힘 때문에 창문이 없는 것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더욱 살기가 편한 환경이었다.
이른 새벽의 공기와 같이 서늘한 돌 벽에 이마를 살짝 가져다 대니 왠지 편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 상태로 눈꺼풀을 살며시 내린 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는 동안 몸은 서서히 그 느낌에 적응해 나갔다. 왠지 저 멀리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한 와드득 소리가 들리는 듯 했지만, 예민한 엘프의 귀가 저 멀리의 인간들의 소리를 듣는 것일 거라고 생각하며 그는 대수롭잖게 그 소리를 무시해 버렸다.
몸을 옭죄어 오던 기묘한 느낌이 느슨하게 풀어졌을 때 쯤 그는 고개를 다시 천천히 들어올렸다. 진한 주황색을 띄면서 물결처럼 흘러들어오던 햇빛은 어느새 가시고 진한 벌꿀색의 무언가와 엷은 주황색이 눈에 띄었다.
잠시만. 벌꿀색이라니.
정신을 차리고 다시 찬찬히 본 창가에는 낮에 자신에게 입술을 가져다 대었던 남자가 아주 멀쩡하게 창틀에 기대어 앉아있었다. 그의 옷과 피부는 그가 아무 고생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깨끗한 상태였고, 그의 입가에는 예의 그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루젠이 헤엄치는 백조마냥 우아하게 창틀에서 소리 없이 뛰어내렸다. 그의 발의 목적지는 고개를 살짝 돌린 채 서 있는 에르미온의 바로 앞이었다.
눈은 동그랗게 뜨고 있었지만 채 놀랄 틈도 없었던 입은 무표정인 에르미온에게 루젠은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꺾으며 가벼운 미소를 보냈다.
“무슨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