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깨달음

“하,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되겠지?”

저렇게 화난 형의 모습은 처음 본다. 아니 저번에 가게에서 한 번 본 것 같기도 하다. 금방이라도 한 대 칠 것 같았지만 한숨을 한 번 더 내쉬었을 뿐 바로 나에게로 주의를 돌려 자상하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급하게 왔는지 정장도 약간 흐트러져 있었지만 평소의 잔잔하게 내려앉은 머리가 아니라 포마드나 젤로 빗었는지 사이드 파트를 한 형은 냉철하고 이지적인 느낌이 들었다.

‘살짝 언더컷 한 것 같기도 하고,’

아, 지금 이러면 안 되지. 이 상황에도 형의 미친 미모를 감상하고 있었다. 무서워하는 여주를 뒤로 물리고 형이 옷을 정리해주고는 밧줄을 풀어주었다. 기력이 없어 휘청거리는 것을 붙잡아 주면서 정장 마이를 벗어 감싸주었다.

“어떻게-”
“일단 치료 받으러 가자.”
“네...”

이제야 안심이 된다. 물론 형이 어떻게 여길 왔는지, 여주는 어떻게 아는 건지. 궁금한 게 많았지만, 그냥 눈을 감고 폭 기대었다. 어깨를 안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형은 그대로 나를 번쩍 안아들고는 이 어둡고 침침한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책임은... 나중에 묻지.”
“아아,”
“나머지는 남아서 정리해.”

지하실을 완전히 빠져나오기 전, 잠시 멈춰서 형이 말했다. 처음 들어보는 싸늘한 말투였다. 여주에게 한 말인지 넋이 나간 여주의 신음소리와 털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아진아~!”
“아진아!!”
“씹-! 강아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역시 지하라서 그런지 여러 사람이 말하니 윙윙 울렸다. 누군지는 알겠는데, 좀 조용히 해주면 안 되겠니? 머리가 초큼 아프구나. 근데 너네 싸웠니? 웬 상처가 많아.

“소리 지르지 마. 아진이가 힘들어 하니-”
“어, 어디 다친 거야?”
“이, 일단 치료부터 해야지!”
“시발, 그러면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 없잖아!”
“병원으로 가죠.”

형이 한 말은 귓등으로 들었는지 다들 자기 할 말만 하기에 바빴다. 그렇지만 대꾸하지 않은 형이 나를 더욱 끌어안으면서 옆에 있던 사람에게 차를 준비하라고 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 학생들은 병원으로 보내.”
“네.”
“뭐야? 누구 마음대로! 야!”

잠깐 정신을 잃었는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차 안이었다. 귓가로 들리는 심장소리가 마음을 진정시켜줬다. 일부러 그랬는지는 몰라도 지금 형에게 기댄 상태였다.

“혀, 큼, 형.”
“잠깐만,”

목이 매여 왔다. 형이 입에 물을 대주었다. 적당히 미지근한 물이었다. 지금 상태에서는 조금 우습지만 역시 형의 배려가 고마웠다.

“고마워요.”
“괜찮아. 별 것 아니야.”
“그래도 고마워요. 모두 다.”
“아니, 오히려 늦어서 미안하지.”
“안 늦었어요.”

뻐근하고 욱신거리는 몸을 움직여 형을 바라보았다. 항상 자신감 넘치고 당당하던 사람이 우울해 있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게다가 이건 형의 잘못도 아니었다.

“형의 잘못도 아닌데, 왜 그렇게 우울해 있어요.”

단정하고 깊은 느낌을 주는 검은 눈동자가 흐릿하게 얼룩져 있었다. 잔뜩 우울한 날씨처럼, 비가 올 것 같은 구름 낀 날씨처럼. 형이 시선을 피하면서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내 잘못이야.”
“그래서 저 안 보려고요?”
“그게 무슨 말이야, 난 그저.”
“놀린 거예요. 고맙다고 말했잖아요. 그런데 거기서 그렇게 말하면 제가 곤란해지잖아요.”
“곤란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것이 너무 귀여웠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완벽한 이 남자가 내 앞에서만 이렇게 약해지는 것을, 사람들은 알까. 또 다시 수마가 찾아왔다.

“곤란해요. 그러니까 자책하지... 말아요.”
“그래. 고맙다.”
“아뇨... 근데 형, 저 조금만... 조금만 더 잘게요.”
“푹 자.”

이마에 따뜻하고 말랑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마법처럼 나는 잠이 들었다.

‘잘 자.’

네, 고마워요.

눈을 떴을 때는 또 다른 곳이었다. 엄청 넓은 곳이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온 몸이 삐걱거리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잠들어있었다고,

“아윽-!”
“아진아!”
“승현이 형?”
“일어났구나!”

너무나 반가워보여서 놀랐다. 형 나 방금 일어났는데 그렇게 꼭 껴안으시면,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좀 아파서요.

“오래 잤어요?”
“음. 사흘은 잔 것 같아.”
“진짜요? 아, 학교 가야 하는데!?”
“아픈데 무슨 학교야, 일단 식사부터 하자.”

약간 어린아이가 투정부리듯이 말하던 형이 침대 옆 테이블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뭔가 싶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는데, 5분도 되지 않아서 어떤 아주머니께서 죽을 가져다 주셨다. 헐, 여기 호텔이에요?

“형, 여기 어디에요?”
“본가.”

별 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한 형이 죽을 퍼서 입에 가져다가 주었다. 평소 같았으면 내가 먹겠다고 그랬을 텐데 충격이 너무 커서 그런지 절로 받아먹게 되었다.

그런 말은 드라마 속에나 있는 거 아닌가요. 점점 형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평범한 직장인 인줄 알았는데 아니었단 말이야? 입 안에 있는 죽을 꿀꺽 삼켰다.

“본가요?”
“응. 아- 해야지.”
“아~”

음, 맛있구만. 빈말이 아니라 진짜 맛있었다. 나 김치낙지죽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이렇게 딱 맞는 걸로 준비 했데?

“맛은 괜찮아?”
“맛있어요!”
“다행이네.”

형이 웃었다. 오랜만에 웃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좋았다. 형이 주는 족족 받아먹으면서 궁금한 것을 하나 둘씩 물었다.

“형, 근데요.”
“응.”
“나 궁금한 게 있어요.”
“말해봐.”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거기 있는 거?”
“어쩌다 보니까.”
“에이~ 말 돌리는 거죠?”
“진짜 어쩌다 보니까 알았어.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몰랐으면 큰일 날 뻔 했잖아.”

농담인 줄 알고 놀리려고 했지만 형의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더 이상 아무 말하지 못하고 남은 죽을 다 먹었다. 죽을 먹고 나자 마찬가지로 버튼을 눌러 아주머니께서 오셔서 치워주셨다.

“씻을래?”
“그 말 기다렸어요. 지금 상당히 찝찝해요.”
“근데 상처 때문에 지금은 씻지 않는 것이 좋을 텐데. 약도 발랐고.”
“네?”
“머리는 감아도 되겠지만. 몸은 나중에 씻자. 어차피 내가 매일 닦아줬으니까.”
“네!?”

아, 이 형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폭탄 발언 잘 하시네. 제 어처구니가 사라졌어요. 우리 아직 그런 사이도 아닌데. 진도가 너무 빠르네요.

혼자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을 아는지 형이 머리도 감겨주겠다면서 방에 딸려있는 화장실로 데려다 주었다. 또 휘말린 건가?

“아뇨! 저, 저 혼자서 할게요!”
“하지만,”
“머리만!! 머리만 감을 거니까 들어오지 마세요!!!”
“아진,”

쾅!!!!

너무 놀라서 형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문을 닫아버렸다. 샤워기 가까이 비척비척 걸어가 물을 트는데 스치듯이 바라본 내 얼굴이 사랑에 빠진 아이처럼 붉었다.

“하아- 이제 어쩌지.”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형이 어떤 사람이든, 무슨 일을 하든. 난 형이 아니면 안 돼.

“!!!”

고개를 번쩍 들었다. 헐, 이거 설마.

“오, 맙소사.”

나 형을 사랑하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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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7-02-21 19:54 | 조회 : 4,066 목록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중에 코난이 계셨었어!!! 여주는 승현이의 동생이 맞아요! 나중에 아진이가 여주의 올케가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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