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나무들이 나의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져갔다. 나는 뛰고 있었다. 등 뒤에서도 이마에서도 땀이 흘러내렸다. 헉헉 대는 숨소리는 곧 끊어질 듯 아슬아슬했다.
아, 또 이 꿈이구나. 자신의 무의식 속에 꽁꽁 숨겨두었던 그날의 기억. 열심히 달리면 검은 그림자가 잡힐 듯 말 듯 가까워져갔다. 막다른 길의 그는 어느새 칼을 들고 어느 여성을 위협하고 있다. 얼굴 주위로 검은 안개가 피어올라 잘 안보이지만 직감으로, 본능으로 알 수 있다.
가인, 그녀다.
절세가인에서 따왔다는 그 이름에 알맞게 찬란했던 그녀. 아름답게 핀 그녀를 품은 것도, 무너뜨린 것도 나였다.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감히 다가갈수도 없었더랬지. 참회의 한숨과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귓가에 앵앵 울린다.
검은 그림자는 울고 있다. 한 발짝, 두 발짝 다가가자 그림자에서 얼굴로 바뀐다. 한태호, 나의 얼굴로 바뀐다. 침대에서 스프링처럼 튕겨나오듯 잠에서 깼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오래전 다쳤던 상처가 미친듯이 욱씬거렸다.
"흐으음..."
옆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준이 옆에서 곤히 자고 있다.
"억...허억.."
미친듯이 욱씬거리는 상처에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혹시나 준이 깰까 입을 막았다. 손가락 사이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진통제를 가져왔던가? 수면제도 안 먹고 잠에 들려하다니, 멍청한 놈. 딴 생각을 하려하면 할수록 상처를 나를 옥죄어왔다. 감히, 잊을 생각이었냐는 듯. 후우- 결코 가볍지 않는 한숨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제발, 제발. 이제 그만 놔주었으면. 난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니. 천천히 삐그덕거리는 몸을 움직여보았다. 근육이 비명을 질러대고 배에 난 옛 상처가 타오르듯 아팠다.
"허억..허억..."
호흡이 가파라지고 정신이 아득해질 즈음, 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태호 형, 태호형?"
"준. 내 주머니에서 약 좀 꺼내다줘. 진통제라고 쓰여져 있을거야. 얼음 주머니도 있으면 좋고"
마지막 힘을 짜내어 속사포처럼 얘기했다. 다행히 알아들은 듯 침대에서 일어난 준이 총총거리며 거실로 향했다.
그 사이, 태호는 다시 누웠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는 듯 쓰러져버린 것이다.
"태호 형? 이거 맞아여?"
큰 소리로 물어오며 뚜벅뚜벅 방을 향해 걷던 준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침실로 뛰었다. 태호가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에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형...? 형?"
"약..."
꺼져가는 불꽃처럼 희미하게 흘러나온 소리에 준은 급하게 약을 흔들어보인다.
"이거 맞아요?"
"응... 물.."
"가져왔어요. 얼른.."
"나...좀...일..으켜..줘"
끊어지는 목소리에 얼른 부축해 일으킨 준. 묵직한 태호가 힘겨운지 이마에서 땀이 또르르 흘렀다. 태호는 익숙하다는 듯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약을 먹었다.
"괜찮아요?"
"너..무..걱정..하지..마.. 자자, 얼른"
그나마 깨끗한 마지막 한마디에 안심했는지 준은 다시 태호를 눕히고 자신도 옆자리에 쏙 눕는다.
"이제... 깨지 말고 자"
말 대신 고개의 끄덕임으로 답을 대신한 준은 곧 잠이 들었다. 태호는 옆에서 허공을 바라보다 준을 바라본다. 가만가만 준의 앞머리를 쓸어준다.
참으로 고마운 아이, 이렇게 사람이 힘들어하면 사연을 물어볼 법도 한데 아무것도 묻지 않아 주어 고마웠다. 넌 ,어쩌다가 범죄자가 되었을까. 태호는 물끄러미 준을 바라보다 자신의 손을 거두고 다시 눈을 감는다. 오늘이라면 편히 잠들 수 있을것만 같았다. 이 지긋지긋한 악몽에서 구해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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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형 일어나요! 아침이예요!"
일어나자마자 준은 이불을 걷어내며 태호를 깨웠다. 태호는 손을 뻗어 준을 눕히고는 다시 이불을 덮는다.
"조금 더 자자, 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으잇, 아침이라구요!"
"어두컴컴하구만, 아침은 무슨"
비가 내리고 이른 아침이라 컴컴한 하늘빛을 실눈 뜨고 본 태호가 답하고는 준의 눈을 손으로 덮는다.
"자자, 아가야."
"나 아가 아닌데..."
툴툴거리던 준도 이윽고 잠에 빠져든다. 둘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꼭 끌어안고, 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