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의 만남 1

한참을 그 상태로 있다가 드디어 마차가 멈춰 섰다. 그리고 병사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자물쇠를 잡는 소리가 들렸다. 예드린은 지팡이를 꽉 쥔 상태로 숨을 죽였다.
덜컥, 문이 열림과 동시에 밝은 빛이 또 들어왔다.

없어! 이번엔 눈치 챈 병사가 없어진 예드린을 보고 소리쳤다. 병사가 등을 돌린 그 틈을 타 상자 뒤에 숨어 있던 예드린은 후다닥 달려와 지팡이로 그의 머리를 가격했다. 중심을 잃은 병사는 휘청거리며 마차 밑으로 떨어졌다. 큰 소리를 듣고 달려온 다른 병사가 마차 위에서 내려오는 예드린과 눈이 마주쳤다.

“저 녀석을 잡아!”

예드린에게 머리를 맞고 쓰러진 병사가 소리쳤다. 그 소리에 한 놈이 아닌 여러명의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천둥같은 우렁찬 목소리였다.


“뭐야?”


어느새 예드린 주위를 둘러싼 상태였고 그들의 손에는 무기와 방패가 들려져 있었다. 예드린에게 있는 것이라곤 손에 들린 낡은 지팡이가 다였다. 쓰러진 병사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쓰러진 병사의 구호에 맞춰 다른 병사들이 달려드려는 순간,


“멈추거라!”


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싸우려고 달려들던 병사들이 제자리에 멈췄고 예드린은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늙은이,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높은 직위를 나타내는 듯 늙은이는 붉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고, 가슴에 금빛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양 옆에는 호위무사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두 남성이 허리에 장칼을 꽂은 채 우둑커니 서 있었다. 예드린은 그와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시선을 회피했다. 그의 손짓에 예드린 주위를 둘러싼 모든 병사들이 물러났고, 어느새 길이 생겨있었다.

그는 호위무사를 이끌고 뚜벅뚜벅 걸어와 다리에 힘이 풀려 땅에 주저앉은 예드린 앞에 섰다. 그는 예드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리둥절한 예드린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내 손을 들어 거칠한 그의 손을 잡았다.

늙은이의 부축을 받고 일어난 예드린은 모든 것이 어리둥절했다. 두 다리로 똑바로 선 다음 늙은이의 가슴에 새긴 문장이 어딘가가 익숙했다.


“지금 이 분이 누군 줄 알고 칼을 겨누느냐!”


늙은이의 말에 당황한 건 오히려 예드린이었다. 그는 이곳이 어디인지도 몰랐고 딱히 고향에서 높은 직위를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일개 평민에 불과했다. 예드린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자 늙은이는 예드린 손에 있는 지팡이를 높게 들었고 모두의 시선이 지팡이를 향했다. 한 마리의 용이 알을 품은 금빛 문장이 손잡이 아래쪽에 박혀 있었다. 그 문장은 늙은이의 가슴에 있는 문장과 똑같았다.


"이 분이 바로 카티하 아리우스님이다."


늙은이의 말에 수많은 병사들은 무기를 땅에 내려놓고 예드린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예드린이 당황해 할 시간도 없이 그들은 그에게 큰 절을 올렸다. 예드린은 어리둥절하면서 속으로 ‘카티하 아리우스’를 생각해보았다.

먼 기억의 한 편을 살짝 톡, 하고 건드렸다. 그러자 떠나기 전 비트롱 남작이 해주던 말을 떠올렸다. 400년 전 망각의 눈물을 찾았던 유일한 사람이 자신의 조상이라는 소리를 듣고 놀라고 믿을 수 없다고, 사람을 잘못 본 것이라고 부인하고 그 자리를 벗어나려던 순간, 비트롱 남작은 그렇게 말했다.

-카티하 아리우스. 그 이름이 400년 전 망각의 눈물을 찾았던 최초의 사람이자 너의 조상이다.

예드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를 박차고 나와 집으도 돌아갔다. 그 어이없는 일을 고모에게 말하자 그녀는 글썽이는 눈물을 감추며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늙은이는 예드린을 데려갔다. 그가 예드린을 데려간 곳은 왕의 앞이였다. 큰 공간에 오직 의자 하나가 있었고, 그 의자에 왕관을 쓴 남성이 앉아있었다. 흰 피부에 노란 머리칼. 잠깐 마주친 그의 눈빛에 기가 죽어 예드린은 고개를 숙였다.

남성은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해 이 상황을 지루해 하는 것 같았다.


“그래, 네가 카티하라고? 별로 늙지도 않았군.”


예드린은 카티하가 아니었다. 늙지 않은 것이 당연했다.


“애반 경,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예드린 옆에 서 있는 늙은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낮은 신분의 애반 경은 고개를 조아리며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얼굴이 변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겉만 번지르르할 뿐만 아니라 말투에서도 배운 티가 팍팍 나는, 번지르르했다. 그는 애반 경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지 입술을 쭉 내밀었다. 실망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애반 경만이 지금까지도 살아있는 할아버지의 측근이었다.

그렇기에 카티하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애반 경밖에 없었다. 실망감이 가득한 왕의 얼굴을 눈치 챈 애반 경은 다시 고개를 조아리고서 대답했다.


“하지만 저 자가 갖고 있는 건 선대 왕께서 남기신 선물이 맞습니다.”


왕은 고개를 돌렸다. 예드린이 긴장감에 꽉 쥐고 있는 지팡이가 반짝였다. 지팡이의 문장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한 마리의 용이 알을 품은 금빛 문장. 이 왕국의 문장임이 확신했다. 왕은 지팡이에 두었던 시선을 거두고 예드린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할배께서 남겨주신 선물을 받은 카티하가 왜 이렇게 어려보이지? 적어도 몇 년이 지났을 텐데. 라며 중얼거렸다. 부담스러운 시선에 예드린은 왕의 시선을 피했다. 왕은 계속 중얼거리다 결국,


“근데 할배 말과 다르게 얼굴은…… 많이 못생겼군.”


속으로 생각하겠다는 말이 그만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는지 예드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호, 더 못생겼군.”


잠깐 동안 일그러진 예드린의 얼굴을 보고 그 틈을 타 입을 놀렸다. 예드린은 이내 제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왕이란 것을 되새기며 일그러진 인상을 푸려고 애를 썼으나 쉽게 변하지 않았다. 왕은 예드린의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보며 관찰했다. 별 감흥은 없었다.

400년 전 할아버지를 구해준 은인이었고, 그는 죽기 직전까지 ‘카티하’라는 이름을 불렀다. 카티하를 잊지 못하고 다른 여인과 결혼해 아버지를 낳았고, 내가 태어난 것이다. 할머니와 아버지께 관심과 사랑을 주지 않은 할아버지가 미웠고, 남의 마음을 갖고 놀고 떠나버린 ‘카티하’라는 인간이 원망스러웠다. 얼마나 좋은 매력을 지녔으면, 그가 참 궁금했는데. 이런 볼품없는 인간이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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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11-01 22:32 | 조회 : 2,035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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