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털, 쪼끄마하고 새카만 발, 겉으로만 보아서는 강아지랑 착각할 법한 주둥이, 그러나 왠지 모르게 새까맣다. 그런데 애매하게 꼬리 끝만 하얀색.
강아지는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위의 빈약한 묘사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지만,저는 여우입니다. 그것도 흑여우
흑형과는 다릅니다. 흑형과는 다르다구요.
...우와! 내가 여우다! 젠장! 내가 여우라니! 그것도 흑여우라니! 재수 없게! 까마귀 같아! 그런데 나 까마귀 좋아하는데! 까악! 까악! 이라고 할 것 없이, 그냥 전생에 사람이었던 여우입니다.
아니 애초에 그냥 이렇게 태어난 걸 어떻게 바꿀 수는 없으니, 일단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딱히 자연의 법칙에 순종하면서 살아갈 생각은 없지만 '야! 이 X발 고양잇과 최강 새꺄! 내가 그냥 여우로 보이냐! 아냐! 나는 존X 쩌는 만렙여우다! 시X! 내가 갯과 최강의 생물이여! 알것냐!'라고 말할 생각도 없이, 평범하게ㅡ
ㅡ풀을 뜯고 있습니다.
저를 얼마전(대략 4개월 전)에 낳아준 어미여우는 제가 이상하다는 듯이 보네요. 제 생각에는...
'아니?! 이상하잖아?! 여우가 왜 풀을 뜯는거지?! 그래! 나 이거 소화도 못시키는데?! 그 뭐냐! 초식동물은 이런 걸로 되새김질도 하고 막 그런데! 나는 배에 그런게 없어요!'
어미여우는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 거립니다. 아이고 뿅가죽네. 여우 모에하네요. 어머니, 그보다도 어째서 저는 검은건가요. 어머니는 평범한 색이신데. 무슨 출생의 비밀이 있는겁니까...?!
무슨 아침 드라마도 아니고, 출생의 비밀이 있으면 그건 무지하게 신날 것 같습니다. 이야호 나도 모르는 아버지, 그 꼬라지나 한번보자.라는 심정으로 친히 아버지 찾으러 떠날 마음도 있습니다.
물론 그 아버지를 찾은 후에 새로운 가정을 만들고 있으면, '엄마는 장난감이었어?! 이 인간... 아니! 여우 쓰레기!'라며, 가정불화를 일으키고 싶네요. 물론 그런 얘기가 통할 일은 없지만요.
뭐 어쨌든, 저도 생후 4개월이고 하니 뭔갈 사냥을 해야 합니다. 계속 엄마 곁에 붙어서 빌어먹을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뭔갈 사냥할 자신이 없습니다.
아이고, 큰일이네. 어떡하냐. 그냥 사람이나 애완견으로 환생했더라면, 좋을텐데. 솔직히 옛날에 개밥을 줄때 개밥맛이 궁금하기는 했어. 무지 고소하고, 기름끼 많아 보이더라고. 젠장! 그때 좀 먹어볼걸!
이라고 해도, 사람이 그런걸 먹는 걸 상상하고 있으면 슈르해지니 그냥 그만두었습니다.
이왕 이런 몸으로 환생한거, 이건 그거내요.
그래, 압도적인 여우의 모에력을 어필하며, 도시로 내려가 인간에게 빌어붙어 살라는 게시입니다. 평소에는 신이란 존재따윈 믿지 않지만, 필요할 떄만 부릅니다. 아 이거, 천벌을 받지 않으려나. 하지만 나는 전설 따윈 믿지 않아!
어쨌든 전설이고 뭐시고, 좋습니다. 일단 저는 잘 먹고 잘 자고, 평안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도시로 가서 주인님을 가지고 싶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이유로, 저는 비정하게 어머니가 자는 사이에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바로, 산 밑으로요.
하지만, 물론 그때는 일이 이따위로 될 줄 알았다면, 저는 그냥 계속 어머니 곁에 붙어있었을 겁니다.
제가 환생한 곳이, 단순한 현대가 아니라, 조선시대라는 걸 알았더라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