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한번 더, 웃어 줘

"저기, 있잖아 시루린"

말을 꺼낸 것은 소년이었다. 여자처럼 가느다란 윤곽, 회색을 띄는 은발머리와 순해보이는 회색 눈을 가진 열 한두살의 소년. 소년의 이름은 쿠니안 스케인-행성 체르파의 수호자 이스켈 스케인의 후손이며 다섯 원소 중 흙을 다루는 가문의 아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다섯 행성 중 세 번째로 강한 가문의 피를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정말 순해보였다. 심지어 소년은 길거리에 기어다니는 작은 벌레 한 마리도 소중하게 여길 것 같은, 그런 순진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소년은 강해지고 싶었다. 왜냐하면 자신도, 자신의 친구처럼 지키고 싶었기에..자신에게 소중한 이들을 말이다.

"왜? 뭐 문제라도 있어?"

"음..그게 말이야, 내가 마법을 잘 통제하지 못하잖아..여기서 해도 괜찮을까?"

쿠니안은 물끄러미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길고 아름다운 푸른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휘날렸다.

"괜찮아, 여긴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곳이잖아?"

친구의 말대로였다. 지금 두 아이가 서 있는 곳은 드넓은 목초지, 게다가 그 목초지는 대륙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작은 섬, 메크레에 있었다. 메크레는 풍경이 아름다워 휴양지로 꽤나 유명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겨울이고, 휴양객이 적은 기간이었다. 또한 이 섬에 사는 이들이 애초부터 적었기에 마음놓고 마법을 연습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쿠니안은 확신이 없었다. 자신이 마법을 통제하지 못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분명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은 꽤나 강한 것이었지만, 자신이 그 마법을 통제할 수 있을지 소년은 알지 못했다.

그의 불안함을 알아챘던 것인지, 친구는 싱긋 웃으며 소년을 안심시켰다.

"만약 통제하지 못한다면 내가 대신해줄께."

쿠니안은 친구의 웃음이 좋았다. 친구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시원시원하다, 그래, 그거였다. 자신의 친구는 머리색도, 눈동자의 색깔도 너무나 시원한 물빛이였다. 게다가 성격 또한 털털하고, 그러면서도 은근히 잘 챙겨주는 친구였다.

"그럼..시루린, 해 볼께."

"그래."

소년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주문을 외쳤다.

"보레..아일로스!"

쿠니안은 주문을 외치자마자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이 미약하게나마 진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엄청난 양의 흙먼지가 사방으로 날리며 소년을 감쌌다. 땅바닥에서 그리고 쿠니안의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흙더미들은 이내 온 땅을 뒤흔들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멈춰, 쿠니안!!"

친구가 크게 외쳤지만 쿠니안은 또다시 정지 상태였다. 실수해버렸다는 자책감 때문에 그리고 너무 두려워서.

통제 불능의 마법.

마법은 그 능력마다 주어지는 힘이 있지만, 그것을 누가 쓰는지도 능력의 강도, 세밀함에 영향을 많이 미친다. 예를 들자면, 가장 강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의 마법 이데마Idema를 쓸 수 있다고 해도, 그 마법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끼칠지 알 수 없다. 반면 상처를 치료할때나 쓴다는 생명의 마법 벨리에는 정말 세심하게 강도를 조절할 수 있다면 사람을 살리는 것은 물론 자신의 신체를 변형하여 공격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또한, 강한 능력을 컨트롤하지 못하게 되어 통제 불능의 마법이 시전된다면, 그것은 시전자의 주변 환경 뿐 아니라 시전자의 정신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심각할 경우, 정신이 산산조각 날 수도 있는 것이다.

소년의 친구는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목초지의 반이 뒤집어졌고, 흙먼지의 토네이도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고 높게 펼쳐졌으며, 소년은 어찌해야 하는지 모르고 멍하니 서 있었다.

"쿠니안, 내 말이 들릴지 모르겠지만 침착하게 행동해! 니가 당황할수록 마법은 더 강해져!"

그 말이 전해졌는지 쿠니안이 이쪽을 돌아다봤다. 하지만 침착하기는커녕 더욱 두려워하는 표정이었다.

"진정하고 마법을 중단시켜!"

소년의 친구가 소리를 질렀지만 소년이 진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친구는 헛웃음을 지으며 귀여운 푸른 눈을 찡그렸다-그리고 중얼거렸다.

"보레 드와인."

거의 속삭이는 듯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효과는 엄청났다. 주문을 입 밖에 내뱉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주인의 명령을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였던 것이다. 곧이어 거대한 광풍이 몰아닥쳐 하늘을 뒤덮은 흙먼지들을 가라앉히고 주변을 차분히 정리했다.

그 광경은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세심하게 땅을 정리하는 것 같아 보였다.

"시루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쿠니안에게 빙긋 웃어보인 푸른 머리의 여자아이는 쉬지 않고 다음 마법을 시전했다.

"니아케스의 이름으로서 명하니 이제 다시 원래대로!"

머리카락이 바람의 휘날려 헝클어지자 여자아이는 쳇, 하고 중얼거리며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이게 문제야, 진짜. 머리카락을 자르던지 묶든지 해야지 원."

"미안해.."

쿠니안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통제 불능 마법을 시전한 것도 자신이었고, 그 마법을 통제하지 못한 것도 자신이었다. 무엇보다 이렇게 연습을 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가장 간단한 원소마법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것이 속상했고 그리고 두려웠다.

소년은 항상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자신이 이런 강한 마법을 가질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서.

"뭘, 괜찮아. 아직 넌 열살이잖아? 앞으로 시간은 많다고."

"하지만...난 항상 이렇게.."

친구가 빤히 쳐다보자 쿠니안은 또다시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여자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쿠니안의 예상과도, 다른 보통 사람들의 반응과도 전혀 달랐다.

"쿠니안, 내가 너랑 처음 만났을 때 뭐라고 그랬었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책하지 말고..포기하지 마....."

"그래, 당연한 거잖아? 넌 아직 열살밖에 안 됐어. 이 행성에서 가장 유명한 케튼 마법 아카데미에 다녔다고 해도 일곱 살때 뭘 배웠겠냐구. 진짜 마법을 연습한 것도 고작 3년이야. 3년만에 원소마법을 완벽하게 컨트롤하게 된다면 그건 미친거지."

여자아이가 목초지의 풀에 털썩 주저앉아 수평선 너머로 떠가는 구름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시루린, 넌 아카데미도 다니지 않았는데 잘 하잖아.."

"비교하면 안 돼, 쿠니안. 나는 그래도 컨트롤이 쉬운 마법을 받은 거잖아. 그리고 난 드와인을 잘 쓰는 대신 다른 기본마법을 못 쓴다고. 안 배웠으니까 그런 것도 있지만."

고개도 돌리지 않고 차분하게 대꾸하는 친구를 보며 쿠니안은 무언가 따듯한 것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과거에 만난 어떤 사람보다도 친절하고, 상냥하고 그리고 또 강하기도 한 사람..

가끔 쿠니안은 자신의 친구가 그저 친구가 아니라, 자신의 보호자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물론 그것은 자신의 친구에게 세 살 차이가 나는 두 쌍둥이 동생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악마라고, 악마의 자식이라고 욕하고,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해 손가락질하기 일쑤였다. 쿠니안은 자신을 악마라고 부르는 것이 틀린 말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자신은 악마와 요정의 능력을 물려받은 이종족 [키르]였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평범한 마법사들과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자신은 태어나서부터 마법사들 속에서 살아왔고, 키르의 땅은 밟아본 적도 없지 않았던가.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을 악마의 자식라고 부르며 멀리했다-사실 자신의 아버지도 키르였으니까. 범죄자로 몰려 처형당한 한 키르가 바로 자신의 아버지였으니까..

하지만 소년은 가끔, 누군가 자신을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뭐 생각해?"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쿠니안은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너 가끔 좀 이상하다? 혼자 멍하니 서서, 아무리 불러도 반응을 안 하거든."

"아..그냥 생각에 깊이 빠져들면 그래."

"그럼 해 지기 전에 연습 한번만 더 하고 가자."

여자아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그 말 한마디에 쿠니안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시루린..또 해봤자 나는.."

"한번만 더 해봐."

쿠니안이 얼굴을 찡그리고 중얼거렸지만 여자아이는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하지만 곧이어 부드럽게 소년을 타이르기 시작했다-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푸른 머리의 여자아이가 칭얼대는 아이를 다루는데 매우 능숙하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고 있었다.

"쿠니안, 너 마법 시전하는걸 보면, 정말 강해. 주어진 능력이 엄청난거야. 게다가 니가 평소에 간단한 마법 시전하는걸 보면 컨트롤 능력도 굉장히 좋다고. 그러니까 한번만 해보자, 응? 잘 할수 있을거란 말야."

"..알겠어..."

여자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자, 그럼 이번엔 방법을 바꿔볼까? 우리 며칠전에 목표물을 움직이는 마법 연습했잖아. 그런 식으로 해보자."

"어떻게?"

"내가 생각하기에, 너는 마법을 시전하는건 잘 하는데, 만들어낸 마법의 덩어리를 컨트롤하는걸 연습해야 돼. 그러니까 처음에는 아주 작은 단위부터 연습하자는 거지."

쿠니안이 의아한 듯 쳐다보자, 푸른 머리의 여자아이가 생긋 웃으며 공중으로 세 개의 공을 불러냈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되는 목표는 이거야."

이렇게 말하며 여자아이는 공을 모두 공중으로 던져 올렸다. 그리고는 깔끔하게 받아내며 다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바로 이렇게 하는 건 힘들잖아? 그러니까.."

여자아이는 공 하나를 공중으로 던졌다가 떨어지는 공을 잡아챘다. 또 하나의 공을 던져 올린 여자아이는 공으로 잡기 위해 손을 내뻗으며 쿠니안에게 말했다.

"이 공 하나하나가, 주먹만한 크기의 흙더미라고 생각해봐. 그 정도를 컨트롤하는건 쉽잖아."

쿠니안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본 여자아이는 생글거리며 웃었다.

이윽고 쿠니안이 보레 아일로스, 하고 말하자 공중으로 흙이 솟아올랐다-하지만 작은 흙더미들의 집합은 아까 전의 위력적인 회오리를 만들어내지 않고, 부드럽게 솟아올랐다가 떨어지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자 소년을 중심으로 땅이 물결치는 것처럼 보였고 쿠니안 또한 그 결과에 굉장히 놀란 눈치였다.

"봐봐!! 잘 되잖아. 진작 이 방법을 가르쳐 줄걸 그랬네."

"하지만..우와, 이거 정말..되잖아?!?!?"

"그래. 사람마다 마법을 컨트롤하는 방법이 다 다르니까. 넌 이 방법이 맞나 보다. 진짜 잘 하는데?"

쿠니안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 방금 칭찬 들은거 맞지?

"그럼 이제 마법을 멈춰봐."

"그래..이렇게?"

쿠니안이 땅으로 손을 뻗자 그를 중심으로 진동하던 흙들이 차분히 땅으로 가라앉았다.

"자, 그럼 오늘 연습은 여기서 끝!! 마을로 가자! 엄마가 맛있는 저녁 해놨을 거야."

푸른 머리의 여자아이는 활기차게 팔을 흔들며 목초지를 가로질렀다. 그 자그마한 실루엣을 뒤따르던 쿠니안은 왜 친구가 이동마법을 쓰지 않은지 궁금해졌다-그리고 그것을 물어보려던 순간, 소년은 깨달을 수 있었다.

여자아이가 자신의 마법 컨트롤을 몰래 도와주다가 마력이 떨어져버렸다는 것을...
게다가 아까도 두세번, 자신의 통제 불능 마법을 제어하기까지 했다.

쿠니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고마웠고..그리고 미안한 감정이, 다른사람에게서 느껴보지 못한 따듯한 감정들이 자신의 마음에 퍼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야! 빨리 안와?"

"..응, 갈게.."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붉은 해가 두 아이의 그림자를 목초지로 길게 드리웠다.



"오늘 정말 대단했어."

"그래도..니가 가르쳐 준 거잖아."

"뭐, 내가 한건 별거 없는데."

그렇게 겸손하게 중얼거리는 푸른 머리의 여자아이.

시루린 자렌, 그것이 여자아이의 이름이였다..

여자아이의 가문, 자렌.

다섯 행성 중 차원과 시간의 행성이자 다섯 번째 행성, 메켈을 수호하는 가문이자 두 번째로 강한 가문.

제1순위 가문 피케메가 최고의 자리의 군림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재력과 권력을 가지고 있는, 그래서 낮에 비유되는 피케메 가문에 반해 밤에 비유되는 가문.

다섯 원소 중 공기를 다스리는 가문..

여자아이는 그 가문의 혈통을 오롯이 이어받은 유일한 후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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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5-09-20 13:30 | 조회 : 1,532 목록
작가의 말
히에

나중에는 삽화도 올려 볼까 고민중입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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