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녀왔습니다~"
"왔어?"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한울의 얼굴에 당황한 것도 잠시, 연지가 얼굴에 살포시 웃음을 언고 한울에게 도도도 달려가 허리를 끌어안았다.
자신의 품에 포옥 안기는 연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한울도 따라 웃어보였다.
"저녁까지 먹고 올 것 같더니, 생각보다 일찍 왔네? 별로 재미 없었어?"
한울이 펑펑 우는 모습을 보인 그 날 이후, 둘 사이에는 미묘하게 변했다.
그 날, 둘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었다. 하지만 다른 어떤 언어로 표현하는 것보다 서로의 마음이 절절하게 전해졌다.
그덕에 두드러지지는 않았지만 무언가가 바뀌었고, 그 미묘한 변화를 둘 다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조금 더 표현하고, 조금 더 물러섰으며 배려하고 있었다.
관계의 발전이라고 볼 수도 있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 둘 다 티를 내지는 않지만 알아차리고 있었고, 만족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요, 재미있었어요. 그냥 오빠랑 같이 먹으려고 조금 일찍 들어왔어요."
"기특한 생각 했네. 하긴 내가 뭘 하고 있던지 보고 싶은 존재이긴 하지"
호선으로 올라가는 입술을 보면서 연지도 따라서 베시시 웃었다.
"허..."
"정곡을 찔러서 할 말이 없지?"
"그런 말 하면 정말 안 부끄러워요?"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부끄러워 할 건 또 어딨어?"
"와 진짜..."
"진짜 놀라울 정도로 멋있지?"
한울이 개구지게 웃으며 연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손에 꼭 맞게 잡히는 부드러운 볼을 몇 번 더 흔드니 샐쭉 노려보던 눈이 다시 예쁘게 접혔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무거나 간단한거요. 먹으면서 영화 보게요. 괜찮죠?"
"그래, 그러자. 그럼 준비하고 있을텐까 올라가서 씻고 내려와."
"네~"
예쁘게 대답하고는 총총 계단을 올라가는 뒷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한울이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몸을 돌려 주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며칠전, 연지가 방학식 날 받아든 성적표에 생각보다도 좋은 점수가 찍혀있었던 탓에 아무런 방해없는 오롯히 둘만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덕분에 연지가 위험에 노출되는 빈도도 확연히 줄어들었고, 도란도란 이야기를하면서 서로를 알아갈 수 있는 기회도 많아졌다.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감정들과, 잔잔하게 느껴지는 행복들.
"계속 이랬으면 좋겠네."
탁-소리를 내며 깨진 계란을 저으며 한울이 중얼거렸다.
"아~ 진짜 요즘 교통사고 너무 많은 것 같지 않아요? 얼마 전부터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를 않아요."
한대의 버스와 두대의 승용차가 도로와 인도에 걸쳐서 이리저리 찌그러져 있는 모양을 본 한 저승사자가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다.
"맞아요. 요즘은 제대로 쉬지도 못한다니까요?"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꼭 한둘씩 영혼도 사라지고."
"어차피 자지 않아도 되는 존재이지 않습니까? 어서들 가서 영혼들 잘 안내하세요."
외모는 어려도, 가장 선배인 여울이 딱딱하게 답했다.
별 것 아닌 듯이 이야기했지만 여울도 이상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귀신의 장난이나 악귀가 원한을 품어서 이러한 사고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고, 운명이 변해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장부에 적힌 것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언제든 바뀔 수 있었고, 어찌되었건 이 사고로 인해서 목숨을 잃을 사람들을 데려가는 것 까지만 자신들의 일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이상하군."
여울이 중얼거렸다.
한구석이 찜찜했다. 확실히 무언가 더 있었다.
원한이 있다고 가정했을 경우, 사고난 사람들 중에 앙심을 품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고간에 딱히 접점은 없었고, 사고 역시 멈추지 않았다.
장난이라고 하기에도 규모가 너무 컸고, 횟수도 너무 잦았다. 걸린다면 처벌받을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정말 이상한 점은 사고가 일어나는 장소였다.
여울은 최근 교통사고가 일어난 지역을 표시해 놓은 종이를 폈다.
사고는 한 지역에서만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을 노리는 것처럼 천천히, 천천히.
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여울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다가 이내 종이를 접어 다시 자신의 품 안으로 넣었다.
궁금한 것은 궁금한 것이고, 지금은 우선 영혼을 회수하는 일이 더 급했다.
"억울해. 억울해...진짜.. 이렇게 죽어버리는 게 어딨어... 아무 것도, 아무것도 못해봤는데."
저승사자들이 모여있지 않은 곳을 조용히 살피던 여울의 귀에 작은 소리가 들렸다.
사고가난 장소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인도로 올라오는 골목진 계단 쪽인것 같았다.
한이 가득 서린 목소리에, 악귀로 변할까 걱정이된 여울이 급히 움직였다.
"진짜 억울하지?"
그때, 뒤이어 들려오는 기이한 목소리에 여울이 발걸음을 멈췄다.
모퉁이 건물에 몸을 숨겨 살짝 훔쳐보자 자신의 몸 옆에 서 있는 영혼과 알 수 없는 또 다른 영혼이 보였다.
여울은 슬쩍 장부를 꺼내 여자의 이름을 찾았다.
이름 한선지.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학생으로, 점심시간에 식사를 하러 가던 도중 사고가 나는 차들에 의해 몇 번이나 떠밀려 계단으로 굴러 사망.
억울하긴 하겠다 만은, 그렇다고 악귀가된다면 마지막까지 최악으로 시간의 종지부를 찍어야 할 터였다.
"그럼 나와 함께 가자. 그렇게하면, 더이상 억울하게 지내지 않아도 돼. 다른 사람들 눈치 볼 필요도 없고, 위축될 필요도 없어."
한 사람의 것이 아닌 듯한 목소리였다.
텔레비전 모든 프로그램이 다 끝나고 갑자기 죽을 사람의 이름이 들리기 시작한다는 괴담에 나올 법한 기괴한 목소리가 영혼을 유혹했다.
"....."
"응? 같이 가는거야."
장부에 있지 않은, 수상쩍은 이야기를 내 뱉는 저 영혼보다도 우선은 억울하게 죽은 영혼의 안위가 걱정이 되어 여울이 몸을 날쌔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날아오른 여울이 비상시에 쓰려고 넣어두었던 부적을 빼들었다.
"뭐야..."
좀처럼 구겨질 일이 없던 단정한 이마가 잔뜩 찡그려졌다.
마지막 채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뛰어오른 여울이었지만, 눈 앞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울은 자신이 해준 떡볶이를 호호 불어가며 오물오물 야무지게도 먹는 연지를 보면서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평소라면 부끄럽다고 그만 보라고 했을텐데, 지금은 영화에 폭 빠져있느라 아무 것도 안 느껴지는 것 같았다.
서연이라는 친구가 추천해줬다는 영화는 '장수상회'였다.
가끔 웃긴 부분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잔잔한 분위기의 영화인데 뭐가 그리 재밌는지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이 때 많이 봐 놔야지.
한울은 영화는 대충 소리만 흘려들으며, 들키지 않게 소파에 바싹 붙어 연지만 열심히 바라봤다.
살짝살짝 웃기도하고 짐짓 자신의 일인 것 마냥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이기도 했던 연지는 영화가 후반부로 치닫자 눈가를 촉촉하게 적셨다.
결국 마지막 엔딩에 입술을 꼭 깨물며 참아왔던 눈물을 주르륵 떨구어냈다.
눈꼬리를 축 늘어뜨린채 열심히 눈물을 닦아내는 연지를 한울이 한 팔로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그리고 토닥토닥-
작고 소중한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연지를 달래왔다.
".....그렇게 슬펐어?"
연지의 떨림이 잦아드는 것이 느껴지자 한울이 낮은 목소리로 다정하게 물어왔다.
"두분이 너무 예쁘셔서 그런 것 같아요.... 너무 예뻐서 눈물이 났어요."
물기가 남아있는 목소리에 한울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예뻐서?"
"네... 진짜 저렇게 시간이 지나고 아무런 기억이 없어도, 그 사람을 다시 좋아할 수 있을까요? 같이 보낸 추억도 과거의 감정도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요."
"다시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요?"
"글쎄..... 나는 잘 생겼으니까, 기억이 없어도 다시 반할 것 같지 않아?"
"뭐에요!"
진지한 표정을 짓던 한울이 얼굴을 가까이 하며 능글맞게 답을하자, 연지가 손을 들어 한울의 얼굴을 밀어냈다.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열심히 밀어내는 연지에도 좋다고 하하 웃던 한울이 갑자기 연지의 두 손목을 잡아 챘다.
".....!!"
그리고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자신을 올려다보는 연지의 이마에 촉-소리나게 입을 맞췄다.
간질간질한 감촉이 계속 이마에 남아있는 것 같아서,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드는 연지가 너무 예뻐서 양 볼에도 촉촉 입을 맞춘 한울이 예쁘게 웃으며 눈을 맞췄다.
"어떻게 인지는 모르겠는데 당연히 그럴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
"...."
"지금 모든 기억을 잃고 다시 시작하라고해도, 나는 너를 다시 찾아내서 다시 좋아할 거거든."
"저도.... 그래요."
연지도 한울과 눈을 맞추면서 작게 미소지어보였다.
살다보면 아무런 이유 없이 확신이 서는 것들이 있다.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다고 느끼는 것들.
둘에게는 '시간이 지나고, 모든 기억이 사라져도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그러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네'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서로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둘의 입술이 부드럽게 포개어졌다.
지금 이순간은 모든 것들이 둘을 응원해주는 것 같았다.
둘은 그렇게 영화처럼, 시간과 기억을 뛰어넘은 사랑을 하는 것처럼,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