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억애

죽은 사람을 또 죽을 것 같이 만들어 놓고는 옅을 숨을 고르고 있는 연지를 빤히 보던 한울이 손가락을 들어 희고 보드라운 뺨을 꾸욱-하고 한 번 눌렀다.

"으음..."

아직 여린 탱글탱글한 피부가 이내 자신의 모양을 찾아갔다.

작은 강아지마냥 낑낑거리며 투정을 부리듯 몸을 뒤척이다가 자신에게 파고드는 작은 몸에 한울의 얼굴에는 옅게 미소가 걸렸다.

따뜻한 체온이 자신이 연지가 괜찮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 같아서.

한울은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연지를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저번에 원령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경계를 강화했었었는데, 그 몇 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에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연지를 봤을 때 느껴지는 기운에 너무 놀랐고, 연지가 힘을 잃고 정신을 잃은 순간부터는 자신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저 왠지 모르게 진욱에게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하아..."

진욱과 연지가 함께한 시간을 절대 무시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여지껏 연지가 잘 지내온 데에도 진욱이 덕이 컸을 것이라는 것도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었다.

그래도 진욱보다 훨씬 더 의지가 되고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었었다.

그런데 특히 이번 일 같은 경우에는 하나부터 열까지 진욱의 도움을 받지 않아야 했던 적이 없었다.

덕분에 죄책감과 경계심 사이의,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이 혼재된 오묘한 느낌이 한울을 짓눌렀다.

특히,

'정말로요. 이건 확실한 거니까 믿으시죠.'

한치의 흔들림 없이 자신을 바라보던 진욱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았다.

도대체 인간 남자 고등학생인 진욱이 어떻게 자신을 보는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지, 왜 자신에게 이러한 미묘한 감정을 가져다주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연지. 시험 잘 봤어?"

언제 가방을 다 챙긴건지 싱글싱글 웃으며 서연이 연지에게 물었다.

"뭐, 괜찮았어."

어제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안타까운 소리와 어질어질하게 머리가 아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밝아있었고, 날짜를 확인한 연지는 뜨거운 물건에 닿은 듯이 침대에서 튕겨져 나와서 욕실로 직행했다.

대강 세수를 하고 오늘 시험을 보는 과목의 프린트물을 들고서 최대한 집중해서 훑기 시작했다.

한울이 건네주는 토스트를 입에 물고, 제대로 말 한마디 섞을 틈 없이 학교로 달려나와 다시 한 번 살피고 본 시험이었지만, 다행히도 시험 결과는 좋았다.

"괜찮아? 너는 하나 틀린게 괜찮은 거냐? 완전 잘 봤네! 방학때 보충수업에서 해방된 걸 축하한다."

"흐흫..그마해."

흘끗 연지의 시험지를 본 서연이 축하의 마음을 담아서 장난스레 연지의 볼을 주욱주욱 잡아당겼다.

"그나저나, 시험도 잘봐놓고는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내일 주말이니까 오늘은 하루 종일 신나게 놀고 충전하자!"

"아..."

잔뜩 들뜬 눈빛을 보내며 말하는 서연 때문에 연지가 말끝을 흐렸다.

한울이 어제 걱정했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오늘 아침은 너무 급해서 말을 제대로 섞을 시간도 없었지만, 한울이 평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의식을 잃고 걱정을 시켰으니 빨리 가서 사과도하고, 이야기도 하고 싶었다.

"뭐여. 우리 시험 끝난 날 금요일을 불태우기로 한 것 잊었어?"

"아, 그런데... 오늘은 조금 그래서.... 일단 오늘은 진욱이랑 훈이랑 놀고 다음에 같이 놀면 안될까?"

"무슨 소리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좋다고 했던 애가, 갑자기 축 쳐져서는. 무슨 일 있는거야?"

걱정이되는 것인지 표정이 굳는 서연을 보면서 연지가 열심히 양손을 흔들었다.

"아니야! 그건 아닌데...."

"오늘은 개인적인 가족사로 연지가 볼 일이 있어거든."

딱히 변명이 떠오르지 않아 당혹스러웠던 상황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연지의 말을 가로챘다.

"연지, 사촌오빠 분?"

"응. 기억하나보네? 오늘 갑자기 조금 일이 생겨서. 그리고, 요즘에 연지가 시험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몸이 별로 안 좋아서. 다음에 실컷 노는 걸로 하고, 오늘은 내가 데려가도 될까?"

고개를 돌리자 생글생글 웃고 있는 한울이보였다.

창틀에 팔을 올리고서는 서연과 몇 번은 본 사이인듯 듣기 좋은 목소리로 대화를 하던 한울은, 어느새 이야기를 끝내고서는 반에 들어와 연지의 가방을 매고는 앞장서서 걸어나갔다.

"그럼, 며칠 푹 쉬고. 다음주에는 꼭 노는 거다?"

"응. 알았어. 고마워! 오늘 잘 놀아."

어쩔 수 없다는 듯 인사를 하는 서연에게 알겠다고 다음주에는 꼭 놀겠다고 약속을 한 연지는 한울을 따라 급히 총총총 걸음을 옮겼다.







"....."

꽤나 밝은 분위기의 얼굴로 연지를 데리고 나왔지만, 한울은 집에 도착해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많이 미안한것인지 흔들리는 눈동자로 흘끔흘끔 자신을 바라보는 연지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섣부르게 입을 열었다가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노력하는 중이었다.

자신처럼 연지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처음만났을때부터 연지에게 특수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려주기도 했었고 귀신을 본 적도 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연지가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친절한 누군가가 주는 음료수를 딱히 경계하지 않고 마셨던 것 뿐이다.

그러니까 잔뜩 겁 먹은 것 같은 저 작은 아이에게 언성을 높히지도, 왜 그랬냐며 추궁하지도 말자.

자신의 격해졌던 감정을 내색해서, 안그래도 감당할 것이 많았던 아이에게 더 큰 짐을 지워주지 말자.

한울을 계속해서 되뇌었다.

자신도 잘 알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럽고 커다란 감정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서 입을 열지 않고 있는 한울이었다.

"일단은 올라가서 옷 갈아입고 내려와. 밥 먹자."

미묘하게 시선을 피하며 힘 없이 말하는 한울의 손을 연지가 두 손으로 꼬옥 감쌌다.

따스한 체온이 손을 타고서 전해져 들어왔다.

"....미안해요."

그러고는 곧이어 울멍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 시켜서 진짜 미안해요. 나는....그냥.... 진짜 미안해요.... 마시지 말라고 했던 거...안 마셨으면 되는데.. 걱정할 일 만들어서 정말 미안해요..."

눈에서 물방울들이 퐁퐁 흘러나와 볼을 타고 떨어졌다.

왜 우냐고.

괜찮다고.

너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앞으로 그러지 않으면 된다고 웃으면서 얘기해주고 싶었는데 목이 매여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진짜 미안해요... 앞으로는 말 하는 데로 잘 들을 테니까... 그러니까..."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에 앞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불구하고 연지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해야 자신의 마음이 전해지기라도 하는 듯.

그렇게 해야만 한울이 사라지지 않는 것마냥 꼬옥 두 손을 감싸쥐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울지 마요."

몇번을 더 횡설수설 하던 연지가 안기가 싶이 한울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

멍하니 그 말을 이해하려하던 한울은 그제야 자신의 눈에서도 연지와 같이 눈물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미안해요 진짜..."

한울은 그 말이 신호가 된 듯, 손을 들어 연지를 꽈악 껴안았다.

빈틈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몸에 연지를 붙이고서는, 자신보다 훨씬 아래에 있는 작은 어깨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펑펑 울기 시작했다.

사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하도 아무렇지 않지 않았고, 하나도 슬프지 않지 않았다.

어제 연지가 무언가를 잘못 먹었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말로 표현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자신을 지배했다.

도깨비가 어떤 산에서 나는 약초라며 들고와서는 이제 괜찮으니까 걱정말라고 했을 때에도, 혹시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해보라며 멱살을 잡고 소리쳤었다.

집에 데려와서도, 숨소리가 고르게 퍼지고 있는 것을 몇번이나 다시 확인하고, 내 옆에서 안전하게 있는 것인지 몇번이나 손을 맞잡아 보고나서야 비로소 진정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오늘도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길까봐 연지가 안보이는 곳에서 계속해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몇 번이나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고, 몇 번이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에 빠져 허우적댔었다.

"...흐으..."

말없이 자신의 등을 토닥이는 작은 체온에, 결국에는 한울이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울은 저승사자가 되고 처음으로, 아이처럼 펑펑 눈물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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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01-26 19:26 | 조회 : 1,519 목록
작가의 말
브리사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도 너무 감사해요ㅠㅠ 요 근래 날도 많이 추웠고, 폭설이 내린 곳도 많다고 하는데 아프지 않고 건강하셨으면 좋겠어요!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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