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그림자가 드리워지는(1)

"뽀뽀해줘."

"네?"

연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울을 바라봤다.

"뽀뽀해달라니까?"

어젯밤, 조금은 갑작스럽게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고백을 했었다.

혼란스러워서 잘 보이지 않았던.

아니, 어찌보면 알면서도 애써 눌러놓았던 마음을 알아차렸던 시간이었다.

나 혼자만의 고민이나 걱정이 아니라는 생각에 행복하기도 했고, 자신을 향한 따스한 눈빛에 더없이 행복하기도 했다.

"해달라고, 뽀뽀."

그 뒤 꿈과 같은 기분에 취해서 자신이 말귀를 잘못 알아들은 것이 아닐까? 하던 생각이 다시 한 번 한글자 한글자 또박또박 내뱉는 한울 때문에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알아챘다.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낯 뜨거운 소리를 하길래 잘 못 들은 말인줄 알았건만, 친절하게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다시 한 번 이야기해주는 한울이었다.

"뽀..뽀요?"

"응, 뽀뽀."

"갑자기, 왜...."

"갑자기라니? 우리 어젯밤에도 했고, 오늘 아침에도..."

"앗! 아.. 알겠어요. 그만하세요."

양 볼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이 자신의 얼굴을 거울 없이 볼 수 없는 것다는 것이 이리도 고마울 줄은 몰랐다.

보이지 않아도 분명 잘 익은 딸기마냥 붉은 빛으로 곱게 물들어 있을 얼굴을 본다면 더욱 더 부끄러워질 것이 분명했다.

"나, 지금 이 옆집 사는 놈이 있는 집에 너 데려다주기 싫어. 내가 어제 말했지? 질투난다고. 그것도 이 아침부터. 다른 아침도 아니고, 특별한 아침이잖아?"

우리가 마음을 확인하고 맞는 첫번째 아침이라고.

투덜투덜하며 뒷 말을 덧붙이려던 한울이 연지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다시 한 번 어제 일을 상기시키면은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사과 같이 잘 익은 것이 한 입 앙!하고 물어보고 싶은 정도로 예뻤긴 하지만 이제야 마음을 확인하고, 좋은 시간들을 보내려는데 펑 터져서 사라지게 둘 수는 없었다.

장난은 이제 그만쳐야겠다고 생각하며 한울이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려는데 볼에서 보드랍고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

한울이 뽀뽀해달라는 말을 했을 때의 연지보다도 눈이 훨씬 더 커진 한울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연지를 멍하니 바라봤다.

"죄송해요... 저도.... 있고 싶기는 한데... 정말 걱정하실까봐... 저한테는 이모랑 삼촌이 가족처럼 중요하신 분들이에요.."

부끄러운지 고개도 못 들면서 열심히 변명을 늘어놓는 작고 예쁜 입술에 한울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앞으로는, 어제 말하신 거 조심하도록 할게요."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긴 두 눈에 한번, 결연함으로 가득찬 앙 다물린 귀여운 입술에 한번.

너무나도 사랑스겁게 심장을 공격하는 두 번의 공격에 한울의 머릿 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 밖에 없었다.

한울은 급히 연지의 팔을 잡아 자신의 품 안에 딱 끌어안고는 입을 맞췄다.







진욱의 집에서 밥을 먹도 들어와서는 부끄러운지 공부를 할테니 방해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꼭꼭 문을 걸어잠고 들어간 연지 생각에 한울의 입꼬리는 도무지 내려올 생각을 안했다.

자신을 얼굴을 못 보고 있다는 점은 얼마 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 이유가 확실히 다른 것을 아니 느낌도 달랐다.

"너무 실실대지 마십시오. 기분나쁘니까."

한참 신이 나서 연지에게 간식으로 토스트를 만들어 주려고 빵을 굽고 있던 한울이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인상을 굳히고 고개를 돌렸다.

"뭐야?"

"할 말 있어서 왔습니다. 잠시 나와주시죠."

"나는 할 말 없어."

먼저 뒤 돌아 걸어가는 진욱의 뒤로 한울이 딱딱하게 말했다.

내가 뭐가 좋다고 저런 녀석이랑 따로 이야기까지 해야...

"....연지에 관한겁니다."

망할.

"뭐야?"

연지와 관련 있다는 말에 밖으로 따라 나오긴 했지만, 한울은 계속 탐탁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쪽이 연지와 뭐가 있어서 그 쪽이 싫어도, 훼방을 놓는 다던가 못된 짓은 하지 않을테니까 경계는 푸셔도 됩니다."

진욱은 그렇게 말하고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젯 밤에 자못 심각한 얼굴로 자신에게 이야기를 늘어놓던 도비의 얼굴이 스쳐지나 갔다.

'나 혼자선 안 되는 거야?'

'솔직히 나도 이런 건 처음봐서 잘 모르겠어. 어떻게 없애버리는지 막는지, 내가 아는 게 하나도 없어. 문제는 생각보다 더 강하다는 거야.'

조근조근 자신에게 풀어놓던 이야기에 점점 더 걱정이 들었었다.

그래서 결국, 상대 만큼이나 얼굴 마주하고 싶지 않지만 이렇게 올 수 밖에 없었다.

"연지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뭐?"

"어젯밤에 원령이 연지네 집 쪽을 보다가 사라졌습니다. 친...구가 따라가보기는 했는데, 다른 영혼들을 잡아 먹어서 꽤나 강해진 상태인지 흔적을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고 합니다. 원령이 있던 장소에서도 오늘 새벽까지도 계속해서 짜쯩나는 기운이 느껴지기도 했던 것을 보면 그냥 넘길 만한 영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원령인 게 확실해?"

"네. 도깨비가 이야기한거니까 확실합니다. 게다가 따라갔을 때 느껴지던 것이, 그저 일이년 된 원령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

"게다가 그냥 원령이 아닌 것 같다고 했습니다. 무언가 얽힌 것 같다는데, 처음보는 거라서 알 수가 없답니다."

거기까지 말한 진욱이 꿀꺽 침을 삼켰다.

꾹 움켜쥔 두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많이, 위험한 것 같습니다."

진욱의 말에 한울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알았다."

연지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와 있으면서, 옆집에 사는 꼬맹이보다도 도움이 못 되고 있다는 생각에 자신에게 화가 났다.

부모님 대신으로 잘 지켜준다고 했는데....

도깨비조차 뭔지 알 수 없다고 하니, 그저그런 녀석은 아닐 듯 했다.

"근데, 도대체 넌 뭐야? 귀신이 보이는 건, 가끔 그런 인간들이 있으니 그러려니 해도 죽을 날이 가까운 녀석도 아닌데 내가 보이질 않나. 도깨비랑 친구를하지 않나."

"저도 딱히 뭐라고 설명해드려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맞긴 한거지?"

"일단은요. 나중에 때가되면 다 알게 되실 겁니다."







하아-

"왜? 어디 아파?"

연지가 포옥 한숨을 내쉬자, 그 옅은 소리도 단번에 캐치한 한울이 눈을 뜨며 다급히 물어왔다.

"아니요."

"그럼 왜?"

"그... 계속 그렇게 보고 계시면 집중이 안되는데..."

연지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도서관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펴 놓은 세계지리 문제집은 한 장도 넘어가지 않았다.

이제 내신을 놓고 정시만 보고 달리는 친구들이 많아 다른 때보다 조금 수월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이 번 시험은 연지에게 중요한 시험이었다.

꽤나 잘 치룬 지난 삼일간의 시험은 집에서 준비를 했었는데, 내일이 마지막 시험이고 하니 쳐지는 느낌이 있어서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긴 터였다.

집에서는 공부하는 자신을 위해준다고 조심하는 것이 눈에 보였었는데, 걱정된다고 따라온 도서관에서는 앞자리에 앉아서 계속 빤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잖아."

"네?"

"좋아하는 사람이 눈 앞에 있는데, 어떻게 안 봐?"

"아..진짜!"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작게 투정을 담은 소리를 낸 연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하하. 알았어. 따뜻한 것 좀 사올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여름인데, 저는 차가운 콜라....."

"안돼."

아까의 그 다정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사람은 어디갔는지 단호하게 안된다고 이야기하는 한울 때문에 연지의 표정이 울상이되었다.

"여기 에어컨 너무 세게 틀어놔서 춥단 말이야. 이런 데서 찬 음료수까지 마셨다가 큰일난다. 기다려. 잠깐 나갔다 올게."

여지껏 그래도 잘 살아왔다는 말을 꾸역꾸역 삼키며 연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지."

강아지에게 상을 주듯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준 한울이 걸음을 옮겼다.

한울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연지는 책상에 엎어졌다.

아니, 아무리 걱정이 된다고 해도 어떻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찬 음료수 한 번을 못 먹게 하냐고.

좋은 날 시험공부 하는 것도 억울한데 차가운 콜라까지 먹지 못하게 된 연지가 입술을 삐죽였다.

똑똑-

"에?"

그 때 엎어져 있는 책상을 두들기는 소리에 연지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자, 한 여자가 보였다.

대학생인 듯 앳되 보이는 외모였는데, 여리여리한 선과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듯한 얼굴 때문인지 대충 걸친 듯한 옷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예뻐보였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옆에서 책 고르다가 우연히 듣게 되서요. 이거 마셔요."

여자는 예쁘게 눈을 접으며 책상 위에 작은 사이즈의 콜라캔 한 개를 올려두었다.

"아, 괜찮아요."

"어차피 급히 약속이 잡히는 바람에 책만 빌려서 친구랑 카페에 가기로 했거든요. 괜찮아요. 아까 그 분 오기 전에 빨리 마시고, 열심히 공부해요."

"아... 그럼 잘 마실게요.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그럼 안녕히계세요."

여자를 따라 고개를 꾸벅 숙인 연지는 신이 나서 콜라캔을 땄다.

그리고 혹여 한울이 올새라 급히 콜라를 입에 털어넣었다.

차갑고 톡톡 쏘는 감촉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으으~ 바로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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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01-05 18:24 | 조회 : 1,800 목록
작가의 말
브리사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2016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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