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빚을 갚고 싶어

"으엇. 연지 여기에 있었어?"

창문을 통해 들어오던 도비가 이불 밖으로 빼꼼나온 머리카락을 보며 물었다.

"응."

"옆집 저승사자가 뭐라고 안해?"

"요즘 완전 땅굴파는 것 같던데?"

여울과 진욱의 코치아닌 코치 탓에 서운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연지 때문에 한울은 당황해서 말라가고 있었다.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와 다르게 살갑지 않게 거리를 두는 탓에 시무룩한 모양이었다.

오늘도 진욱의 집에서 놀다올거라고 하는 연지에게 안된다고 이야기하려다 '하긴, 누구는 일주일 넘게도 안 들어오는데 친구끼리 노는 것까지 허락받으실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여울 탓에 낑낑거리기만 했다고 들었다.

"다른 저승사자랑 많이 친해졌나봐."

"뭐. 공통의 적이 있으니까?"

요즘 진욱과 여울은 곧잘 연락을 하고 있었다.

딱히 접점이랄 것이 있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둘다 곧고 성실한 성격이라 서로 서로가 마음에 들었다.

"너는 그렇다고 치고 그 저승사자는 선배 아니야? 일을 못했나?"

"그 인간이 일을 많이 만들어줬었나봐."

"그렇군."

도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잠깐 봤지만 고급스럽게 생겼는데 성격이 딱 그럴 것 같긴 했다.

"뭐 좀 더 알아낸 거 있어?"

한울이 집에 들어간 후로도 도비는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며 놓친 원령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힘을 많이 빼놓기는 했지만 그렇게 도망갈 정도라면 아직도 원한이 많이 남아있었다.

또 다른 영혼들을 포섭해서 세력을 키우지 말라는 법도 없었고, 복수든 뭐든 하기 위해 다시 돌아올 것은 확실해보였다.

딱히 방법이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연지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방법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던 진욱을 위해서 열심히 수소문을 하고 있는 터였다.

"내가 원하던 정보가 아니긴 하지만."

"뭔데?"

"그 원령말이다. 다시 돌아올 것은 확실해보이니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어. 더 꽁꽁 숨었을 테니까. 내가 알던 더 오래 산 도깨비나, 정령들에게 물어봤는데 찾는게 쉽지는 않을 거래. 다른 지역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고. 분명 다시 세력을 키워서 공격할 것 같다고 하더라고. 왜 그게 연지를 향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

도비의 말을 듣던 진욱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비참함이 가득한 표정에 도비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마 이렇게 몰렸을 때에는 최후의 한방을 준비할 거라고 했어. 모든 것을 다 내던져서 영혼까지 부숴버리는 것이 목표일 것 같데. 저쪽 도깨비가 백년 전쯤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긴 하더라고."

표정이 풀리지 않는 진욱을 보면서 도비가 한숨을 내쉬고 진욱이 기다렸을 말을 시작했다.

말해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저런 표정을 보다가 망가지는 것을 보느니, 행복한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순간을 막아내면 다시는 해코지를 못한다는 거지."

진욱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정말?"

"응. 네가 말했잖아. 너가 다 부서져도 저 애만 살리면 된다고. 다른 방법은 나도 잘 몰라. 여튼... 네가 그 순간에 대신 그 것을 막든... 받으면 끝난다고. 더 이상 뭔가는 없어. 그 원령도 다 부서져버릴테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듯한 끔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진욱의 표정이 어디에도 없는 보물을 찾은냥 행복하게 변했다.

"고마워."

"흥."

도비가 고개를 훽 돌렸다.

제가 첫 정을 준 인간이니 도비에게 있어서 진욱은 각별한 존재였다.

연지도 진욱이 좋아하는 친구이니, 또 마음이 깨끗한 인간이어서 좋았던 것이지 진욱처럼 애정이 가는 것은 아니었다.

제 친구가 대신해서 죽어도 좋다고.

저렇게 환히 웃을만큼 좋아하니 도와준 것 뿐이지..

"진짜 고마워."

진욱이 슬프게.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신 죽으라는 방법을 가져왔는데 뭐가 그렇게 고마워?"

"이제..."

먼 시간의 건너편을 바라보는 듯하던 진욱이 목이 메이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드디어 빚을 갚을 수 있게 된거니까."







"김씨 집안의 여식이 혼례를 올릴 나이가 되었다고 하더구나."

명나라에서 들어온 화려한 비단과 장식품으로 치장된 방에, 그게 못지 않은 옷을 입고 있는 아버지의 앞에 앉자마자 들은 이야기는 흔한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예?"

"김 서원이라고 알지 않느냐. 이 동네에 양반댁 규수가 별로 많은 것도 아니고."

"예. 하지만.."

"그래. 다른 곳과 혼례 얘기가 돌고 있기는 하지."

싹둑 말을 자르는 아버지에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그런 아들의 표정은 안중에도 없는 듯 앞에 앉아있는 욕심많은 영감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계속해서 내뱉을 뿐이었다.

"어쩌겠는가. 세상이 바뀌고 있고 나 같은 돈 버는 상인같은 것들도 힘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이 오고 있기는 하지만 그 신분 하나 때문에 여기저기 걸리는 제약이 얼마나 많은지 너도 모르는 않지 않느냐. 무너져가고 있긴 해도 번듯한 이름 하나 있는 집안 여식이라도 내 집에 들이면 가문 위세가 올라갈 거다."

"하지만 그 혼담이 오고가는 집안이 이참판댁 아들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어찌.."

참판직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이 참판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은 동네에서 덕망이 높기로 칭찬이 자자하였다. 김씨 집안의 규수도 착하고 집안이 어질어서 둘의 혼례 얘기가 나돌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잘도 어울리는 한쌍이라며 자신들이 다 신나하고 있었다.

그렇게 살지는 않으면서도 사람들 관심과 시선에 예민한 제 아버지가 그 소문을 듣지 못하였을 리는 없었다.

"하여튼. 지 어미를 빼다 박아가지고 멍청하기는! 이 참판이 지금 참판이더냐? 이제 물러난지도 좀 되었고, 게다가 돈이라 함은 우리가 더 많다."

죽은 어머니의 얘기까지 나오자 참지 못하고 얼굴이 구겨졌지만, 앞에 앉은 아버지는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네가 평민 계집이라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구박만 받던 어머니는 결국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셨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계집질만 하던 사람이었다.

어머니의 말씀이 있었기에 남아서 예를 다하려고는 했지만 최악 중의 최악인 사람이었다.

"계집 마음 하나 사로잡는 것이 뭔 대수라고. 반반하게 생긴 얼굴 이럴 때 아니면 쓰지도 못할 것 아니야. 혼례 얘기는 이미 해 놨다. 가서 협박을 하던 홀리던 알아서 널 선택하게 만들어라."

"하지만 아버님. 아버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미 얘기도 많은 집안이고 소문에 두분이 잘 만나시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시끄러워!!!! 누굴 닮아서 제 아비에게 훈계질이야! 가서 무슨 짓을 하던 데려오라고! 이 이름이 필요하다지 않아! 네 어미 묘와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 잘 건사하고 싶으면 알아서 하라고!"

집어던진 찻잔에 얼굴에는 순식간에 생채기가 났다.

붉게 새어나오는 피에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사내는 꼼짝하지 않았다.

"...예."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입에서 나온 것은 깔끔한 한 단어였다.

저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무시하기에는 어머니와 그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동생은 제게 너무나 큰 존재였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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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6-12-24 21:41 | 조회 : 1,595 목록
작가의 말
브리사

ㅎㅎ 저번에 함께 올리는 것을 까먹어서 오늘 두개를 올리게됐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즐거운 크리스마스이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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