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암~"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온 연지가 작게 하품을 했다.
두팔을 올려서 기지개를 한 번 쭈욱 펴고 난 다음에, 호스가 있는 울타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보충수업도 없는 방학임에도 일찍 일어났는데, 그래도 뭐가 그리 좋다고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은색의 꼭지를 돌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스 끝에서 천천히 물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럭무럭 자라라~"
콧노래까지 부르다가 낯간지러운 말을 내뱉은 연지가 다시 혼자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완전 주책이야.
"무럭무럭 자라야 할 게 누군데?"
정신차리자고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위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연지가 고개를 들었다.
운동을 가는 것인지 트레이닝복을 차려입고 스포츠백을 맨 진욱이 피식 웃으면서 연지의 이마에 살짝 딱밤을 놨다.
"쪼꼬만게 자기도 못 컸으면서 괜히 열심히 자라고 있는 식물들한테 스트레스를 주네."
"아!"
"머리도 딱딱하면서 엄살은. 이렇게 좋은 날 아침에 더 안자고 왜 나왔어?"
"계속 비가 안왔잖아. 물 줄라고 그랬지."
연지가 물이 졸졸 흘러나오고 있는 호스를 살짝 들어보였다.
"그나저나 너는 아침부터 연습하러 가는거야?"
"그래야지. 이제 슬슬 시합이기도 하고."
"힘들지?"
"안 힘들다면 거짓말이지. 이번에 감독님이 무슨 내기를 한건지 눈에 불을 키고 계시더라고."
다른 때보다도 몇 배를 돌리는 감독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울이 살짝 몸을 떨었다.
"그래도 뭐, 좋아해서 하는 거니까 괜찮아."
"바빠도 밥이랑 뭐 영양제같은 거 잘 챙겨먹어. 저번에도 이모가 걱정 많이 하시던데."
아직도 소녀같은 얼굴로 아침부터 연습을 하는 진욱의 몸이 상할까 울먹거리던 정원을 떠올리며 연지가 말했다.
"하여간, 맨날 튼튼하다고 놀라시면서도 항상 걱정이시라니까."
진욱이 투덜거리듯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부드러운 억양의 말 속에 그러한 엄마에 대한 사랑과 그러한 관심을 받고 있다는 데에 대한 만족감이 느껴져 연지도 엄마가 된 것 마냥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아침부터 기분 엄청 좋아보이네."
"뭐...."
"시험은 그래도 예상했던 거고, 성적 나온지 꽤 시간도 지났으니까 진학문제 해결되서 그런 건 아닐테고?"
빤히 자신을 응시하는 두 눈에 연지는 그저 흐흐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내가 저승사랑 같이 사는데, 요즈음 그 분이랑 사이가 너무 좋아서 그런가봐.'라고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저 눈을 바라보고 거짓을 이야기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래. 뭘 하든 그냥 그렇게 행복하게만 잘 지내라."
연지의 곤란함을 읽은 것인지 진욱이 말머리를 돌렸다..
"오빠는 간다."
그리고 엄청난 위력의 스파이크를 날리는 손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만큼 부드럽게 연지의 머리를 흐트렸다.
자신과 같이 걸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기다란 다리로 휘적휘적 빠르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연지는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잘은 모르겠지만 마음 한 켠이 욱신거리는 것 같기도하고, 미안한 것 같기도 한 기분에 연지의 얼굴에 피어있던 웃음이 수그러들었다.
무언가 놓친 것을 찾으려고 그러는 것인지 진욱이 사라진 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본능이 움직감정의 끈을 좇아 그 원인을 찾으려는 듯이.
그 때 눈 앞이 어두워지더니 어깨에 무개감이 느껴졌다.
"뭘 그렇게 계속 보고 있어?"
"에?"
"에?는 무슨 에?야. 아까부터 외간남자랑 노닥거리는 것도 모자라서 뒷 모습까지 아련히 쫓는 것까지 다 봤는데."
한울이 투덜거리며 연지의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고 자신의 품을 끌어안았다.
자기는 아침부터 맛있는 거 먹이겠다고 밥을 안쳐놓고 후딱 시장에 다녀오려던 참이었는데.
열심히 물을 뿌리는 연지의 모습을 볼 생각에 즐겁게 문을 열고 나와서 보인 것은 기대하던 그림이 아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투샷을 열심히 참아내고 방해꾼이 사라졌는데도, 출장가는 남편 배웅하는 부인마냥 그자리에서 진욱이 사라진 곳만 바라보는 연지에 입술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제가 언제 외간남자랑 노닥거렸다고 그래요."
아이같은 투정에 연지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국어 공부 잘 한 거 맞아?"
"저 이번에 1등급 나왔잖아요. 칭찬까지 해줘놓고는."
"그런데 왜 외간남자 뜻을 몰라? 친척이 아닌 남자는 다 외간남자야."
"그러면 오빠도 외간남자거든요?"
"엄연히 따지면 나는 인간이 아니니까 안 속하거든요."
"진짜 말은..."
결국 자신이 졌다는 듯 미안하다며 품에 안겨오는 연지 덕분에 한울의 얼굴에도 어느새 연지를 닮은 맑은 웃음이 걸렸다.
"그럼 물 주고 가만히 집에 있어. 잠깐 장 좀 보고 올게."
"알았어요."
"어디 나가지 말고. 알았지? 나 보고 싶다고 막 마트까지 쫓아오고 그러면 안된다. 알지?"
"절대 그럴 일 없어요."
"그럼 다녀올게~"
자신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는 연지의 이마에 촉-하고 짧은 입맞춤을 한 한울이 대문을 나섰다.
다시 한 번 필요한 물품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걷는데 발 밑에 툭-하고 무언가 걸렸다.
'뭐지?'
내려간 시선에는 낡은 자동차 장난감이 한 대가 뒤집혀있었다.
족히 10년 전에 만들어진 자동차를 모델로 한 장난감인 듯 보였는데, 험하게 쓴 듯 여기저기가 부서져 있었다.
"하여간."
한울은 혀를 차고는 너덜너덜한 장난감 자동차를 쓰레기를 버리는 쪽으로 밀어두었다.
마당 곳곳에 물을 뿌리고 소파에 편히 앉자마자 울리는 핸드폰은 정원에게서 온 전화였다.
"이모?"
-응. 나야~
언제 들어도 봄처럼 상냥한 정원의 목소리가 답했다.
"어쩐 일이세요?"
-다른 게 아니라, 내가 이것저것 좀 사려고 나왔는데. 깜빡하고 반찬 가져다 주는 걸 잊어서 말이야. 내가 나오면서 가져다주려고 식탁 위에 까지 올려놨는데 잊어버렸지 뭐니.
"아~ 그러실 수도 있죠."
-정말 나이가 드나봐. 나 정말 꼼꼼했었는데~
"아니에요~"
-어머~ 솔직히 말해도 괜찮은데.
소녀처럼 웃는 목소리가 또르르 굴러 귀에 들어왔다.
-아니, 참. 그래서 집에가서 반찬 좀 가져가라고. 오늘 진욱이도 늦게 들어오고 그이도 일이 많다고해서, 오랜만에 나온 김에 친구들 만나서 놀고 저녁도 먹고 가려고 했거든. 먼저 좀 가져다가 먹어. 반찬 상하니까 지금 가져다가 먹어, 알았지?
"네."
-그래~ 그럼 끊을게.
"네."
연지는 기분좋게 전화를 끊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욱은 외형적인 부분에서는 아버지는 빼다 박은 꼴이었지만, 성격은 어머니를 꼭 닮아있었다.
항상 세심하고, 상냥하고, 배려할 줄 알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겉치레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
정말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그리고 자기 자신들도 행복할 줄 아는 가족이었다.
매일 자신의 끼니를 걱정하시고 자주 집에서 밥도 먹이고 간식도 챙겨주시면서도 오늘도 역시 맛있어 보이는 반찬들이 반찬통에 정갈히 가득 담겨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어도 자신이 우울해하고 비관하지 않고, 곧바로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
친구들도 사귀고 즐겁게 지낼 수 있었던 것.
이 모든 것은 모두 자신의 곁에서 가족과 같은 사랑을 베풀어준 진욱과 진욱의 가족들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옥에 나뒹굴 뻔 했던 자신을 단단히 붙잡아준 사람들.
자신의 울타리가 되어주신 분들이었다.
새삼스레 징하게 울리는 가슴에 연지의 눈가가 촉촉히 젖었다.
"....."
평소와 다른 차림의 여울이 진지한 표정으로 연지의 집을 빤히 응시했다.
갓 대신에 잘 정리된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내보이고, 검은 두루마기 대신에 옅은 하늘색 티에 바지를 갖춰입은 캐주얼한 모양새였다.
"큼! 안녕하세요. 저는 한울님의 후배인 여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연습한 대사를 중얼거렸다.
아무리 저승사자와 함께 사는 사람이라고는 해도 사람은 사람.
자신을 보고 많이 놀라거나 거부감을 가지지 않을 수 있도록 여울 나름대로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도 해보도 저렇게 해봐도 도무지 어색함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고, 업무상의 이유가 아닌 사람을 만나는 것은 죽은 이후 처음이었기 때문에 답지 않게 단단히 긴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안녕...."
열심히 인삿말을 열심히 연습하던 여울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근처의 커다란 나무 뒤로 잽싸게 몸을 숨겼다.
이런 자신의 행동에 한숨을 내쉬고 슬쩍 몸을 돌려 바라보자 옆집에서 나오는 연지가 보였다.
기분이 꽤나 좋아보이는 연지의 얼굴을 본 여울이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했다.
무작정 집에 들어가거나 초인종을 누르는 것보다 이렇게 밖에서 이야기하는 편이 연지에게도 부담이 더 될 것 같고.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다시 한 번 머릿 속으로 어떻게 이야기할지 그리는데 갑자기 느껴지는 이상한 기운에 여울의 표정이 굳었다.
분명 그 때 그...
그리고 급히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느껴졌다 사라진 기운을 좇다가 불안한 예감에 연지가 있는 쪽을 바라보자 화분이 가득한 2층 창문에서 자그마한 요괴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위험합니다!"
여울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
갑자기 들려오는 큰 소리에 연지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빠른 몸놀림으로 순식간에 연지에게 다가온 한울이 연지를 안고 옆으로 넘어졌다.
"앗!"
놀란 연지의 비명소리와 함께 화분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십니까?"
손으로 땅을 집고 상체를 들어올린 여울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아, 아......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눈만 꿈뻑 꿈뻑거리는 연지가 한박자 늦게 대답을 했다.
"다행입니다. 그럼 집에 들어가 계십시오."
아직 몸을 일으키지 않고 말하는 여울의 시선은 아직 창가에 있는 요괴에게 가 있었다.
빨리 잡아 문책하려고 하는데 힘도 주지 않은 몸이 들여올려졌다.
"여기서 뭐하냐?"
자신을 급하게 연지의 위에서 들어올린 힘의 주인공은
"여울."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자신의 선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