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 균열(3)

죽고싶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을 흔쾌히 죽여드리겠습니다.

아프지 않도록. 부드러히 흩어질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당신이 마지막으로 행복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저희가, 감히, 신을 돕겠습니다.

-

전체 탑의 처벌 담당은 란느로 정해져 있다. 레키시아 왕국은 이미 멸망했기에 개인의 힘만으로 자리에 앉아있는 유일한 탑장라는 이유도 있고, 사사로운 감정이 없다는 이유도 있다.

그렇기에 그녀는 대륙에서 집행관으로 통한다.

“북방 탑장님.”
“안됩니다.”

이름만 불렀는데도 내가 무얼 요구할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답이 날아왔다.

“세르반 바크는 내 기사에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개입은 허가할 수 없습니다.”

꽤나 단호했다. 단단한 벽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어째서죠.”

내 물음에 란느는 조용히 캐모마일 티를 한 모금 들이켰다. 향긋한 내음이 퍼졌다. 달콤하면서도 담백한, 조금은 시큼하면서도 따뜻한 향이였다.

“예비 총책임자님. 저는 말입니다, 죄를 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당신의 기사가 가진 이번 일에 대한 죄업은 별로 무겁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어째서…”
“책임자님은 바크 경에게 어떠한 처벌이 내려왔는지 아직 모르시는군요.”

그러고보니 모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혼자 다짐하고는 여기까지 들이닥친거라니. 정말, 민폐다.

란느가 딱딱하게 말을 이었다.

“그에게는 일주일간의 근신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아…”

뭐야. 바크 가문이라는게 크게 작용한건가. 근신, 그것도 일주일. 생각보다 강한 벌이 아니다.

이건 베키시가 무슨 큰 벌이라도 받을 것처럼 말해서다. 결코 내 잘못이.

음, 사실 맞다.

“미안…합니다. 제가 조금도 모른채로 이곳에 와서 탑장님의 일을 방해했군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려는데, 란느가 내 어깨를 확, 잡았다.

“책임자님은 일개 탑장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걸 시작으로 잔소리가 다다다 이어졌다.

“중앙 탑장님께도 많이 휘둘리는 편이라 들었습니다. 그러한 관계는 책임자님이 우위이며 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목줄은 당신이 들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당긴다면 우리의 목을 조를 수 있는 무기를 말입니다.”

나는 반대라고 생각한다. 갑이라는 이름으로 을에게 묶인. 그런 관계. 그게 셰이드와 나의 관계다.

“두 분이 알 수 없는 계약을 하셨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시점으로 책임자님이 탑에 합류하게 된 것도 알고 있습니다. 수없이 죽으려고 하시는 모습을 봐왔으며, 그럼에도 단 한번이라도 죽지는 않으시는 것을 봐왔습니다.”

그럴 수 밖에.

“두 분 계약 내용. 설마, 책임자님의 죽-”

쾅!

언제 와있던 건지. 문이 반쯤 바스라져 있었다.

어우, 미친놈의 얼굴이 보였다.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마나는 불규칙하게 일렁이고 있었기에, 나는 작별을 건낼 수 밖에 없었다.

“저는 이만, 알았으니 가보겠습니다.”

따끔거리는 시선이 옆얼굴에 꽂히는 것을 무시하고 란느를 향해 웃어보였다.

“…모쪼록, 탑의 영광이 함께하길. 그리고 중앙탑장님, 수리비는 시일내에 보내십시오.”
“기꺼이. 돌아가자마자 보내도록 하죠.”

“…고마워요, 북방탑장.”

고개는 숙이지 말라고 했다. 그렇지만 감사인사 정도는 괜찮을거다.

셰이드가 손목을 휘어잡고는 밖으로 끌어당겼다. 바스러진 문이 보여서 란느를 돌아보니 익숙한 듯 차가운 표정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밖으로 거의 끌려나갔을 쯔음, 안에서 란느가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죽지 마세요.

그 말이,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기에. 셰이드에게 끌려 가면서도 작게 웃음이 터졌다.

손목이 시큰거렸기에 더 웃었다.

북방탑의 영역에서 벗어나 중앙탑에 들어서자, 그제서야 셰이드가 손목을 던지듯이 놨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일그러져있다.

와, 나 쟤 저런 표정 처음 봐.

“최근에, 제가 말했을텐데요. 제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나십니까.”
“방에 있으라 했죠.”
“맞습니다. 그런데 왜 나갔죠?”
“전 나갈 필요성을 느꼈기에 나간겁니다. 내 기사가 걱정됬거든요.”
“그렇다고 이런 시기에 나에게 말도 없이 나갑니까? 그러면 다입니까? 굳이 내가 사태의 심각성을 일깨워 드려야겠습니까?”

심각성 정도야 이미 알고있다. 배가 관통당한 적도 있고, 그 범인을 쫒다가 대현자 스칼렛이 실종되었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지금 가장 위험한 건 나라는 것도.

“죄송해요.”

일단 마음데로 나간건 확실히 내가 잘못한게 맞다. 그래서 고개를 굽히고 나갔다. 고개를 숙이지 말라고 일렀던 란느의 말이 귀에 박혔지만 무시했다.

우리는 란느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다.

그렇기에.

“뭐가 죄송한겁니까. 죄송하긴 한겁니까. 계속 실수가 나오는 것 같아서 묻는 말입니다. 실수인지 고의인지 모르겠지만.”

암녹색 눈이 짙게 가라앉았다.

흘깃거리며 마법사들이 이쪽을 쳐다보는게 느껴졌다. 굳이 탑 복도에서 이렇게 눈싸움을 해야하나 싶기도 한데.

“후… 일단 자리를 옮기죠.”

셰이드도 그 시선을 의식했는지 다시 내 손목을 잡으려다 멈췄다.

“아.”

하얀 와이셔츠 사이로 보이는 손목살이 울긋푸릇했다. 그러게, 왠지 엄청 욱씬거린다 싶었다.

어째서 총책임자의 핏줄은 힐 마법을 쓸 수 없는건지 모르겠다. 그럴 수 있었다면 셰이드가 보기 전에, 모두. 지워버렸을텐데.

셰이드가 이번에는 부드럽게 손목을 잡았다. 잡았나기보다는 감쌌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연둣빛 파릇한 색감의 마나가 반짝이며 손목에 스며들었다. 힐은 복잡한 마법이였으나, 시동어 하나 없이 힐을 사용한 탓에 주변 인파가 더 몰렸다. 곁눈질로 자꾸만 이쪽을 응시하는게 느껴졌다.

“일단, 우리 좀 들어가는게.”

내가 살짝 웃어보이자 셰이드는 손목에서 손을 떼고는 바로 발아래에 진을 그렸다.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내 어깨를 감싸는 그의 손길이 느껴지자마자 눈앞이 변했다.

집무실이다.

이처럼 공간을 넘고 이동하는 능력은 대대로 블리아드 가문에서 쓰이기로 유명했다. 그래서인지 저번에 베키시와 탔던 이동 마법보다 덜 울렁거렸다.

“아프다고 말하지 그랬어요.”

셰이드가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넘기며 책망했다. 본인 힘이 어떤지 본인은 모르나보다.

“아프다고 하는 법을 못 배운 탓에.”

내 대답에 셰이드의 얼굴이 희미하게 차가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집무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악!”

그러자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나온다. 결코, 내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아니다.

놀라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니, 의자에 찌그러진 인영이 보였다.

새하얀 머리칼. 보랏빛으로 형형한 눈동자.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조차 안가는 미인.

“총책임자…?”

아니. 아니다. 분명 맞지만, 아니다.

“아야야… 어? 꼬맹이 너… 미켈 클라우드?”
“아, 네에.”
“괜한 수작질 말고 돌아가세요, 아레우스. 왜 여기 있는거죠?”

그가 뒷통수를 문지르며 의자에 늘어졌다. 셰이드의 말에 반항이라도 하듯, 입술을 삐죽거리며. 누구인지 감이 왔다.

“총책임자님을 뵙습니다.”

아직은 내가 예비 총책임자니까. 현 책임자는 그가 맞다. 그러니 예를 갖춰야 한다.

내가 고개를 숙이자, 방금 빤 빨래마냥 축 늘어져있던 아레우스가 몸을 확 일으켰다.

“그 호칭! 진짜 오랜만이다.”

그러고는 소년처럼 히히, 웃는다. 얼굴 형은 셰이드를 똑 닮아서는 그렇게 웃다니. 머리색이랑 눈색만 바꿔도 셰이드 그 자체인데. 말도 안돼게 보배로웠다.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 심정이 이런 느낌일까. 뭔가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을 마주한 느낌이였다.

“지금 두 사람, 제 말을 무시하는 건가요?”

동경 가득한 분위기를 깨는 살벌한 목소리가 들리자, 아레우스가 멋쩍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갈게, 형. 나 갈게. 그런데 그 전에, 꼬맹이랑 잠깐 얘기 좀 해도 돼? 총책임자 대 총책임자로. 괜찮지?”
“개소리만 안한다면요.”
“아하핫, 좋아.”

아레우스가 친근하게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셰이드가 듣지 못하도록 일시적으로 방음마법을 걸었다.

“꼬맹아.”
“네?”
“내가 충고 하나 해도 되지?”
“네, 괜찮아요.”
“그렇다면야.”

아레우스가 무릎을 살짝 굽혀서 내 귀에 입을 가져다 댔다. 굳이 이러지 않아도 방음마법이 걸려있을텐데.

“형을- 그러니까 중앙 탑장을 제외한 그 누구도 믿지 않는게 좋을거야. 여러모로 말이지.”
“…….”

조금 의외였다. 아레우스와 셰이드는 사이가 좋지 않다고 전해진다. 지금 두 사람의 기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왜죠?”

그 물음에 아레우스는 작게 웃었다.

“미켈은 죽을 때까지 행복하다가 마지막에 모든 것을 빼앗기면서 죽는게 좋아, 아니면 그저 그렇게 살다 그저 그렇게 죽는게 좋아?”
“당연히…”

당연히 뭐?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건 착각일까. 내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내 것이 아닌 마냥 떨린다.

“나는 둘 다 싫었어.”

대답을 더이상 강요하지 않고, 아레우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도망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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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1-02-09 08:52 | 조회 : 858 목록
작가의 말
하젤

너무너무 오랜만이에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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