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누구긴, 니 동생이다(3)

“여, 이게 누구야! 백색 꽃! 우리의 뱁새!”

제발. 그 입 좀 다물어줘. 세르반의 눌러참는 웃음소리가 작게 들렸다. 끅끅거리는게 꽤나 웃긴 모양이였다. 들어오자마자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커다란 체격이 앞에 드리워졌다. 세르반보다 억, 할 정도로 더 컸다. 어째 전보다 더 커보여서 새삼 비교되는게 느껴지자 짜증이 났다.

주변의 시선이 자꾸만 힐끔거리는 걸 무시했다. 날 알아보는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보다 더 많기는 했다. 백색 꽃은 꽤 유명한 편이였으니까.

뭐라고 불렸더라. 에리카? 다른 것때문이 아니라 보라색 눈과 쏟아져 나오는 자색 마나가 에리카 꽃망울 같이 피어오른다고 해서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불리긴 했다.

물론 그건 대외적인 경우. 이 망할 청색은 다 깡그리 무시하고 뱁새라고 불렀다. 꼬맹이 주제에 내뱉는 말이 뱁새같다고.

“청색아, 조용히 그 입 닥쳐.”
“크하하하핫!”

나름 세게 쏘아붙인 말이였는데 청색 꽃은 뭐가 그리 웃긴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투박한 손으로 막사를 열어젖혔다. 회의실이였다. 10살 쯔음의 기억이 떠올랐다. 피가 휘몰아치던 회의실에서 쿠키 먹고 있던 기억. 웃기네, 참.

“들어와라, 들어와. 거기 뒤에 있는 기사 양반도. 같이 볼일이 있는거지? 네가 누군가를 데리고 다닐 리가 없으니 말이다.”

청색의 말에 세르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고? 실력에 자신이 있는거겠거니 했지만, 그래도 총책임자 주제에 혼자 다니는 건 좀.

그런 표정을 본 청색은 세르반에게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싱글벙글한 옆집 아저씨같은 느낌.

“어쨌든 오랜만이군, 뱁새!”
“한번만 더 그딴식으로 부르면 교수대에 매달아버릴 줄 알아.”
“아이고, 총책임자 얻어먹었다고 더 살벌해진 거 봐라. 교수대 끌고 오겠군.”
“이럴때 아니면 그 망할 총책임자 어디다 써먹겠냐?”
“크하하하핫! 역시 뱁새. 못할 말이 없어! 이래서 마음에 들었다니까.”

청색이 또다시 호탕하게 웃었다. 더 말했다가는 페이스에 휘말릴 것 같아서 그냥 입을 닫았다. 대신 커다란 테이블에 발을 떡하니 올리고 편하게 의자에 앉아 기댔다.

“그래서 우리 뱁새는 뭐가 필요해서 날 손수 찾아오셨을까나?”

청색이 곧바로 주제를 돌렸다. 역시 잊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편하게 늘어지는 이유가 오히려 기분이 더러워서라는 사실을.

“내 동생. 아직 여기에 있지?”
“...까마귀를 만나려고?”
“그래.”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커다란 천막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뭔 일이라도 있었는지, 청색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왜지.”

청색은 벌어지지 않는 입을 달싹 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수상하다. 확실히 무슨 일이 있었던게 분명했다.

“까마귀들이 옛날에 살던 곳에 검이 하나 봉인되 있다는 전설이 있던데. 알아?”

일부러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 청색이 곧장 얼굴을 찡그렸다.

“그게, 왜.”
“내가 그 봉인을 푸는 법을 알거든. 그런데 길을 몰라.”
“그래서!”

청색이 벌컥 소리쳤다. 동시에 내 의자 뒤에 서있던 세르반이 검을 빼들었다. 빠른 발도에 잠깐 주춤하던 청색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았다.

“내가 조금 흥분했네.”
“…….”

그가 화를 내는 것도 조금은 이해가 갔다.

“세르반 경, 검 집어 넣어.”
“…예.”
“여기서는 절대로 검 꺼내지마.”
“하지만,”
“여기에 네 적은 없다. 있다 해도 내가 너보다 강해.”

그 강하시다는 분이 피 흘리면서 픽 쓰러지던게 아직도 기억나는데.

홀의 뒷편에 서 있었던 세르반이 작게 중얼거렸다. 미켈은 그냥 무시했다. 부정할 필요 없는 사실이기도 했고.

“까마귀를 데리고 가는건 안돼. 잠시 보게는 해줄게.”
“그 애를 다치게 할 생각은 죽어도 없어. 왜 그렇게 감싸고 도는거지? 내가 없는 동안 일이라도 있었나?”

내 물음에 청색이 낮게 침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나를 한번, 반질반질한 책상을 한번 보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네가 직접 가서 보는게 나을 것 같군.”

뭐야, 정말 불안해지게. 회의실을 나서는 청색의 발걸음이 질질 끌리는 듯 했다.

* * *

‘빌’

촤아악, 허공을 향해 서류가 신경질적으로 휘날렸다.

“이건…”

‘빌’, 흔하디 흔한 이름. 심지어 성씨가 없는 걸로 보아 평민이였다. 거대한 대륙 안에서 이름이 빌인 평민이 몇명이나 될까.

베키시가 입을 앙다물었다. 두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방법이 없다. 어머니를 찾아낼 방법도, 적을 쫓을 방법도.

“클라우드군이,”

셰이드가 흩날려진 서류를 밟고 선채 낮게 말했다.

“클라우드군이 위험합니다.”

베키시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미켈을 부상입힌 자, 어쩌면 단체를 찾던 어머니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현재 가장 위험한 위치에 있는 건 미켈이였다.

“미켈은 지금 탑 내부에 있으니까 괜찮을ㅡ”
“나갔습니다.”
“뭐..?”

베키시가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셰이드가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

“미켈 클라우드군은 현재 외출한 상태입니다. 그것도 세르반 바크경 한명만 데리고요.”

아, 뒷목이야. 머리가 띵해지는 걸 느낀 베키시가 옅게 헛웃음을 웃었다. 이젠 미켈을 찾아내서 데려와야 했다. 산넘어 산이라더니.

셰이드가 오른쪽 소매를 걷어올리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들었다. 검날이 길게 손목을 그으며 피가 흘러내렸다. 능숙하게 피를 작은 유리병에 담은 셰이드가 베키시에게 병을 내밀었다.

“이건?”
“가지고 있으십시오. 마력 증폭액입니다.”

하?

“그럼, 미켈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직도 상처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셰이드는 웃었다. 베키시는 어이가 없어서 멍청하게 그를 응시했다.

…지금 심부름 시키는거지, 저 자식?

* * *

“누구...”

미켈은 할 말을 잃었다.

하얀 침대 위에 반쯤 열린 창문에서 노을빛이 쏟아졌다. 그 덕에 원래 검붉은 피가 더 붉어보였다. 하얀 셔츠에 피가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그마저도 빨래가 된 상태였던 모양인지 약간 흐려져있었다. 빨래가 되고도 지워지지 않는 피를 남긴 작은 소년이 겨우 숨을 쉬고 있었다.

“누구긴, 니 동생이다.”
“…….”

청색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가고 난 이후로 상태가 악화됬어. 나도 할 수 있는 수는 다 써봤고. 너한테 전갈도 몇번이나 보냈는데 누군가 막았나보군.”
“…셰이드, 이 개자식이..!”

손끝이 서늘해지는게 느껴졌다. 다른 사람을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그럴만한 사람은 한 명 뿐이였으니까.

“보다시피 정신만 겨우 차리고 있을 만한 상태야. 아, 물론 지금은 잘 자고 있지만. 깨우지 않는게 좋을걸.”
“그럼... 언제 대화가 가능한데?”
“글쎄. 아침에는 일어나지 않을까 싶어. 약도 챙겨 먹어야하고.”
“…그렇군.”

미켈이 뚫어져라 동생을 바라보다가 침대로 걸음을 딛었다.

하얀 손이 창백한 뺨을 쓸었다. 식은땀에 젖어 머리카락이 뺨에 엉겨붙어 있었다.

그러한 제 동생에게 시원한 마나를 밀어넣었다. 속은 다치지 않게, 몸을 감싸며 식힐 수 있도록. 한결 편해진 동생의 표정이 보였다. 가볍게 아이의 이마에 키스한 미켈이 뒤돌아보았다.

착잡해 보이는 청색과 여전히 기사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는 세르반.

“경, 나는 오늘 탑에 돌아가지 않아.”

결단한 듯한 엄숙한 목소리가 방에 퍼졌다. 세르반은 이해했다. 몇년동안 보지 못했던 혈육이 아프다. 언제 숨 넘어갈지 모르는 얼굴로 피가 낭자한 채 침대에 잠들어 있다. 냉혈안이 아니고서야 돌아갈 수 있을리가.

“셰이드님께 연락을…”
“아니.”

그 새끼한테 연락하지마.

미켈의 입술이 비뚜름하게 말려 올라갔다. 세르반이 침묵했다.

“그럼 우리가 따로 탑에 말해드리면 되겠군.”

청색이 애써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분위기 회복은 커녕 더 사늘하졌다.

“내가,”

미켈이 잠시 입을 달싹거리다가 이어 말했다.

“내가 직접 연락하지.”

죽여버릴거야, 망할 셰이드.

조용히 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세르반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순간이였지만 방 전체가 농도 짙은 살기에 휩싸였었다. 물론, 미켈의 동생이 누운 침대를 제외하고는.

청색이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넘겼다.

“휴... 알아서 해라.”

그가 성큼성큼 방을 나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세르반이 곧바로 물어왔다.

“대체 여기는 어딥니까? 뭐하는 단체죠? 미켈님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동생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도 없는데요.”

진정해라, 세르반. 하나씩 좀 물어봐.

미켈이 귀찮다는 듯 웅얼거리며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다시 소중한 동생의 이마에 손을 올린 그가 말했다.

“여기는 내가 어릴적 자라온 곳이야.”

긴 이야기가, 시작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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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20-10-28 15:49 | 조회 : 921 목록
작가의 말
하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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