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에리카(1)

‘탑’, 이 사회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곳이다. 탑은 총 5개가 존재하며, 각각 동서남북과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그 탑들 중 가장 높게 평가되는 곳이 중앙탑이며, 중앙탑에 사는 이들은 가장 귀하게 대접 받았다. 그 대신, 중앙은 모든 것을 지휘해야하며, 각각의 탑을 항상 견제해야했다. 그리고 그 모든 탑들의 주인이, 바로 [총책임자]였다.

-

“이게 마지막, 중앙탑이란다, 미켈.”

미켈 클라우드는 거대한 탑을 보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행동에는 전혀 감정이 실려있지 않았다.

“탑은 다 똑같이 생겼네요.”

대략 5년이 걸린 여행 동안, 모든 탑을 돌아본 미켈이 내뱉은 말은, 그게 다였다. 공기가 잠깐 멈추었다. 흩날리던 로브가 축 늘어졌다.

“그, 그게 끝이니?”

가이드랍시고 뽑힌 동방 탑장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안경을 고쳐쓴 그는 말없이 탑을 바라보는 미켈의 어깨를 두드렸다.

“전혀 감상이 없구나.”
“그래요.”

동방 탑장이 허-, 하고 실없는 웃음을 웃었다. 웃기는 일이였다. 세계의 구원자가 될 아이였다. 그러나 정작 그는 구원에 관심이 없었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남기 위해 행동했다. 그것은 무의식적인 행동이였다. 미켈이 취하는 모든 행동은 불필요함을 전부 걸러낸듯한, 한마디로 살기만을 위한 것 같았다.

“네가 앞으로 이 모든 탑을 관리해야 할거다. 그런데도…”
“더 할말은 없습니다. 저도 꽤나 바쁘고요. 5년동안 헛짓거리나 한 느낌이네요, 예랑님”
“헛, 헛짓거리라니…”

동방 탑장, 아니 예랑은 충격받은 듯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미켈, 너는 총책임자가 되어야 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는건가?”

미켈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빙긋 웃었다. 그 미소가 불안정했다. 남빛 로브가 어깨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로브 사이로 하얗게 센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이름만 멋진 희생양에 불과하다는 사실도요.”

새하얀 백발과 자안, 총책임자의 상징. 하지만 총책임자라는 말은 사실상 하나의 단어에 불과하며, 역할은 희생양이였다. 그리고 미켈은 무엇보다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예랑이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무슨, 애가 근성이 없어. 몇살짜린데 벌써 삶을 포기한채 죽을상이란 말인가.

“알고 있으니… 다행이군.”
“천만해요. 그리고 그말 이번으로 57번째입니다.”
“미, 미안하다.”

피식, 웃은 미켈은 탑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얀 소년의 손가락이 탑에 들어오는 해를 가렸다. 그 사이로 빛이 흘러들어왔다.

“예랑님, 이제 저에게는 2년의 시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 총책임자가 될때까지, 앞으로 2년이 남았군”

‘그래-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내가 죽을 때까지 2년이 남았지.’

미켈은 삐딱하게 웃었다. 이미 모두 내려놓은지 오래였다. 동공은 이미 흐려져있다. 마치 보석같이 반짝이는 보랏빛 눈은 빛이 비춰지고 있을 뿐, 빛을 내뿜지는 못했다. 이를 증명하듯 예랑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였다.

“그때까지… 저는 무얼하면 됩니까?”
“사리기만 하면 된다. 남은 2년 동안은 죽음의 싸움이 될거다. 내일 바로 네 존재를 공표해야 하거든. 존재 공표가 되면 바로 자객들이 옳다구나, 하고 네게 달려들겠지.”
“그들로부터 저를 지키면 되는 거죠?”
“그래.”

나비가 날아왔다. 나비는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서 꽃에 앉았다. 그를 향해 손을 뻗은 미켈은, 나비를 분질렀다. 사이코패스는 아니였다. 그저 기분이 더러웠다.

“걱정되네요… 제게 달려들 자객들이.”

예랑이 숨을 삼켰다.

“얕보면 안돼. 이 과정에서 죽은 총책임자들도 파다하다.”

그는 흘러내린 로브를 주워, 미켈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손놀림이 부드러웠다. 막연한 정을 나타내는 듯했다. 예랑은 탑장 중에서도 무척 정이 많은 자였다. 그래서 이 정을 이용하려는 자도 많았다. 미켈이 혀를 찼다.

“또다시 총책임자를 찾아나서야 하는 우리 탑장들에게도 귀찮은 일이지. 최대한 죽지 말아라.”

‘…나 참.’

미켈이 웃었다. 로브 오른편의 금줄을 왼편에 묶어 고정시킨 후, 다시 머리까지 둘러써서 가린 그는 천천히 탑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걱정마세요. 저는 안죽습니다.”

미켈이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강자의 여유로움이 언뜻 느껴졌다. 예랑이 몸을 떨었다. 저 서늘함은 몇년을 같이 있어도 익숙해지질 않았다.

예랑이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고, 미켈은 작게 웃으며 탑으로 발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글쎄. 너의 그 자신만만한 말이 어디까지 갈지.”

뒤에서 누군가 비꼬는 듯한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사실 이 정도는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말을 한 상대가 누구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란테온… 아니, 지금은 서방 탑장이라 부를까요. 뭐, 곧 란테온이라 부르게 되겠다만. 어쨌든 서방 탑장은 또 뭐가 아쉬워서 시비를 거시는지?”
“머리에 피도 안마른 꼬맹이가 지껄이는 꼴하고는. 내가 너보다 몇백년은 더 살았어.”

‘으, 꼰대..’

미켈은 꺼내고 싶었던 말을 목뒤로 삼키며 생각했다. 가장 마주치기 싫은 부류였다.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손을 세게 쥐었다. 손톱이 여린 손바닥 살을 파고 들어 얼얼했다.

“당신은 어차피 내가 죽길 바라겠죠. 속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방해가 되는거죠?”
"쿡, 알긴 아는군?"
"그렇다면 걱정마시란 소리는 하지 않겠습니다. 전력을 다해서 방해할테니까요"

적발을 늘어트린 란테온은 턱도 안됀다는 듯 날카롭게 웃었다.

“아하하하핫- 아핫- 으하하핫, 그게 무슨! 크하하핫”

“...푸, 품위를 지키게, 란테.”
“드디어 미쳤습니까, 서방 탑장?”

고래 싸움에 등터지게 생긴 예랑이 우물쭈물 끼어들었다. 그가 안경을 비스듬히 세우더니 다른 한 손으로 머리끝을 매만졌다.

습관이였다. 불안할 때의 습관.

"크하하핫! 고작 네가 방해를 하겠다고? 너는 그럴 수 없어! 불가능해! 방해하기도 전에 죽어있을테지!”

그말에 미켈보다 빠르게 반응한 예랑이 정원의 하얀 석고 조각상을 내던졌다. 곧 파열음이 이어졌다.

“예, 예랑, 이게 무슨 짓이야!”

간발의 차이로 날아온 조각상을 피한 란테온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무릎을 털었다. 그의 앞쪽에 쳐박힌 천사 조각상은 기괴하게 조각나 있었고, 뿌연 석회가루가 휘날려 눈 앞을 가렸다.

“그대는 총책임자의 자리를 넘볼 수 없네.”

못박듯 내리꽂힌 한마디. 란테온은 잠깐 멈칫, 하더니 옅게 웃었다. 아까의 날카로움에 비하면 조금은 누그러진 느낌이였다.

“알고 있어. 잘- 알고 있지.”
“…….”

역시 오랜 친우였다. 하지만 틀렸다. 란테온은 망할 총책임자의 자리에 설 생각이 없었다.

두 거물 사이에 쟁쟁한 시선이 오갔다. 미켈은 한숨을 내쉬고 로브 모자를 아래로 세게 끌어내려 얼굴을 가렸다. 한심하긴.

“먼저 들어가 있겠습니다. 원하는 만큼 싸우고 오세요.”

아무 미련없이 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저런 영감탱이들 싸움에 끼고 싶은 생각같은 건 없었다.

“싸, 싸우다니, 아니다! 같이 가지, 미켈.”
"허...!"

예랑이 다급하게 말하며 미켈에게 따라붙었다. 그런 그를 보며 란테온은 혀를 내둘렀다. 깐깐하기로 유명한 예랑을 애 다루듯 쉽게 다루는 사람은 미켈 밖에 없을 터였다.

그만큼 치기에 쉽지 않았다. 미켈의 신력을 동반한 힘은, 그 누구라도 간단히 굴복당할만큼의 힘이였다. 탑장과 맞먹는 힘.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탑장들조차 상대하기 힘든 그를 일반 자객들이 상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였다. 접근하기도 전에 신력에 눌려 즉사할 테니까.

“하핫…”

‘이 어이가 없을만큼 강한 소년에게는- 역시, 그 방법 밖에 없는 건가.’

란테온은 중앙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렸다. 정보 길드에 가기 위해서였다. 미켈과 예랑이 탑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란테온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일그러진 모습이였다.

“제기랄, 꼬맹이의 약점이라도 찾아야겠군.”

그것을 덜미로 잡아, 스스로 미켈이 목숨을 내놓도록 할 생각이였다. 그런 신력 인재를 살려둘 순 없었다. 특히 [제사]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무조건 죽여야 했다.

“그림자, 그대들도 찾아봐. 그 불행한 아이의 소중한 것을 잘게 부숴버린다면, 무너지겠지. 그래야 우리에게 좋아. 방해물은 미리 치워둬야 하거든.”

그림자란 모든 탑장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만의 병력이였다. 그림자 이외의 모든 병력은 총책임자의 손에 있기에, 탑장들은 그림자를 최대한 많이 두려고 한다. 그마저도 20명으로 제한이 있기에 쉽지 않았지만.

란테온 역시 16명의 그림자가 있었다. 이번 명령 역시 그들에게 내린 것이였다.

날아온 석고상을 피한다고 가르마가 헝클어져 붉은빛 머리카락이 앞까지 흘러내려있었다. 꽤나 호전적인 편인 란테온은 성질이 급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참았다. 예랑은 란테온의 오랜 친우였다.

"바보 같군"

란테온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중얼거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기에는 앞으로 쳐야하는 일들이 너무 컸다.

그는 허리에 고정된 검집을 만지작거렸다. 그에게는 위대한 목적이 있었다. 그것을 위한 첫번째 단계를 드디어 실행할 때가 왔다.

비릿한 미소가 란테온의 입에 걸렸다.

만인의 배신자의 미소였다.

* * *

향긋한 내음이 났다.

부드럽고도 향기로운, 코끝을 감겨들면서 속에 닿기 전에는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리는, 그런 아찔할 정도로 강한 꽃의 향이 났다. 여기에 정말 꽃이 있었다면, 벌도 나비도 몰려왔을지 모를정도로 생생했다.

소년이 지나간 길마다 그런 달콤한 향이 났다.

강한 힘은 모두에게 매력적인 제안이였다. 저것만 있다면, 저것만 있다면. 인간의 욕구를 철저히 불러일으켰다. 마치 덫처럼 그들은 향에 걸려든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매혹의 향기 속에 파묻힌다.

그리고,

[콰드득-]

밑바닥까지 끌려내려간 채 참혹하게 죽어버린다. 흰 눈이 그곳에 쌓이고,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소년은 다시 향을 풍기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꽃의 향은 점점 옅어진다.

무대 앞에 선 소년이, 아래로 추락한다. 끝도 없이 긴 절벽에서 얼마간 떨어져내린다. 스쳐가는 바람과 돌조각이 몸을 햘킨다. 그리고 바닥이다.

아, 드디어 죽음이구나

소년은 눈을 감는다.
꽃은 졌다.

3
이번 화 신고 2020-09-29 10:29 | 조회 : 1,653 목록
작가의 말
하젤

연재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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