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미샤가 떠난지 4일이 될 동안 정말 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뭘 하며 보냈나 생각을 해보니...
정말 책만 주구장창 읽었구나.. 그러다 질리면 영화 몇 편 보고..

“하준님, 점심식사를 안하셨는데요..”
“아, 지금 가져다 줘. 간단히 먹을 수 있는걸로.”

점점 시간 개념도 없어져갔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 아닌 이상 딱히 음식도 땡기지 않고..
오늘도 마찬가지로 눈을 뜨자마자 잡은건 핸드폰이었다. 영화를 보다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또 점심 때를 놓친 것이었다.

“율리아 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3시가 되어서야 내 앞에 놓이는 음식들.

“식사가 매번 이렇게 늦어서야 되겠습니까..?”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몇 일이 됐는지 그것도 잊은 채 사는데 뭐.. ㅋ”
“...............”
“오늘은 뭘 준비했어?”
“리조또 입니다. 음료는 레모네이드를 준비 했구요.”

언제부터인가 밥을 먹을 때마다 나가지않고 내 앞에 서서 온갖 수다를 들어주는 율리아.

“양도 많은 것 같은데 같이 먹자.”
“예에...?”
“미샤도 없고 뭐 이 정도는 괜찮지 않아...?”
“저는 신경쓰지 마시고 어서 드세요. 저는 1시에 이미 먹었답니다.”
“그러지 말고.. 맨날 나만 먹기 미안해서 그래. 너랑 수다도 편하게 떨고 싶고.”
“...........”
“나 밥 먹는데 율리아는 서서 그게 뭐야.”
“... 하준님, 그러면 밥은 괜찮구요.. 함께 앉아... 있어도 괜찮을까요..?”
“당연히! 얼른, 얼른.”

말을 하지않아서 그렇지 역시 그녀도 힘들었던 것이다. 매일 내 앞에 서서 그 수다들을 다 받아줬으니..

“율리아, 넌 남자친구 없어? 묻는거 실례..인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요..”
“오! 좋은 사람이야? 율리아 정도의 외모면 분명 그 남자도 엄청난 미남일거야, 그렇지?”
“예.. 잘생긴데다 성격마저 좋은 사람이예요.. ㅎ”

좋아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눈은 정말 반짝거리고 있었다.

“고백은 안 해?”
“..제가 어떻게 감히...”
“왜에?! 율리아라면 상대방도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일텐데?! 나도 처음 널 보고 정말 놀랐었거든.”
“ㅋ.. 하지만.. 그 남자는 이미 다른 사람을 품고 있는것 같아서..”

반짝이던 그녀의 눈이 갑자기 매우 슬퍼보였다.

“... 음.... 미안해.. 율리아..”
“괜찮습니다..”
“그래도 고백은.. 해보지... 짝사랑.. 너무 슬프잖아...”
“그래도.. 될까요..?”
“인생은.. 후회하지않고 사는 것이 중요하니까..”

나도 모르게 평범하지만은 않았던 바깥에서의 내 생활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에이..! 이런 얘기는 집어치우고! 난 서재에나 갈래.”
“더 안드세요..? 거의 남기셨는데..”
“배불러. 책이나 읽을래.”

남아서 뒷정리를 하는 율리아를 조금 도와주고는 밖으로 나와버렸다.

“한재민, 가자.”
“아, 서재에 가시겠습니까?”
“응.”

매일 같은 곳, 같은 자리.

“오늘은 또 뭘 보지?”
“그럼 저는 이만 밖에 대기해 있겠습니다.”

그리고.. 또 혼자.
이제는 이 모든 생활들이 너무 익숙해져버렸다.
내게 존댓말을 쓰는 재민도, 어디를 가든 따라다니는 검은 양복들도, 그리고 나를 죄여오는 조임쇠와 정조대 까지..
이제는 모든 것이 당연했다.


무엇을 읽을지 한참을 찾다가 ‘에드워드 툴레인의 신기한 여행’ 이라는 작품을 발견했다. 단지 표지가 마음에 들었던 것인데..

-타악-
“?”

책의 첫 장을 폈을 때, 웬 사진 한 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웬 사진?”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집어들고 바로 살펴보았다. 어떤 나이든 중년의 여성 한 명과 밝아 보이는 여러명의 아이들이었다.

“고아원.. 인가?”

아이들 하나하나가 너무 행복해보였다. 해맑은 것이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처음에는 마피아인 주제에 고아원 후원이라도 하나 싶었는데..
.......... 그게 아니었다.

아이들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내가 아는 몇 얼굴들이 보였다.

세르게이, 한재민,
그리고
.....
미샤까지...

조금 어리지만 확실히 그들이었다.
사진을 보니 그리 오래된 것 같지도 않고, 세 명 모두 지금의 모습과 거의 흡사했다.
확신할 수 있었다.

“뭐야.. 진짜. 어렸을 때부터 서로 다 아는 사이였던거야?”

재민에게 물어보면 실례가 되려나..?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책 사이에 사진을 껴두고 서재 밖으로 나갔다.

“한재민..”
“뭐 필요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그게 아니고..”
“예, 말씀하십시오.”
“잠깐 들어와봐.”

재민의 손목을 붙잡고는 서재로 끌고 들어왔다.

“하.. 하준님?!”
“너랑 세르게이, 그리고 미샤. 무슨 관계야?”
“...!! 예에..?”
“이상해서.. 분명 사진에서는 서로 오래본 사이같은데.”
“사진.. 이라니요..? 서재에서 대체 뭘 뒤지신 겁니까.!?!”
“뒤지다니?!! 말을 왜 그렇게 해? 책 사이에서 나와서 본 것 뿐이야..!”
“...................... 아.. 죄송.. 합니다. 저도 모르게 흥분을 해서.. 용서하십시오...”
“..... 쳇..”
“............ 하준님..”
“.... 뭐.”
“... 이곳에서 뭘 보셨든, 무엇이 궁금하시든.. 그 무엇도 하지마십시오. 보스께는 특히 그 어떤 언급도 하시면 안됩니다..”
“.......”

그래.. 내가 주제 넘었지. 내 주제에 무슨..

“절대.. 보스께..”
“오늘 본 것을 모른 척 하라는 거지.? 됐어. 이해했어.”

저렇게나 당황한 재민은 또 처음인 것 같은데..

“다 알겠으니까 그만 나가봐.”
“저.. 하준님.”
“응.”
“.......”
“뭐, 말해.”
“... 내일부터 낮까지는 세르게이가 하준님을 경호하게 될겁니다.”
“.. 아.. 이제 다시 학교에 가는구나.. 그럼 주말에도?”
“아니오. 평일만입니다.”
“좋겠네. 잘 다녀. 뭐.. 니가 내 얘기를 떠벌리고 다닐거라 생각은 안하니까..”
“...........”

학교..
학생이면 당연히 다녀야 하는 학교..

더이상 내 인생에 학교, 그리고 친구 이런건 없는 것이겠지.
내 삶은 더이상 나의 것이 아니니까..

연애도.. 결혼도..
삶도, 죽음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으니까..

“김성윤한테 나 잘 있다고만 전해줘.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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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8-12 17:34 | 조회 : 4,262 목록
작가의 말
귤떡콩떡

독자분들, 제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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