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끝의 시작

1화-끝의 시작

끝없는 어둠속 허공에 떠있는 듯한 부유감.
오감각이 마비된 상황인지 아무것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몸은 움직여졌지만 시야는 여전히 암전한 상태.
난 대한민국의 평범한 여고생인데 왜 이렇게 된걸까.

'.....뭔가 떠올리고 싶지 않아.'

분명 오늘 학교를 가기 위해 집을 나왔던 거는 생각이 난다.
하지만 그 이후를 기억하려고 하면 불쾌감과 함께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왔다.
솔직히 학교를 갈려고 집을 나온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생각하지말자...'

어차피 지금은 다 소용없는 것들이다.
현재 내가 추측하는건 죽었다는 것.
왜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상황은 내가 죽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일이다.

'죽으면 다 이런걸까.'

사후세계가 있다고 좋겠다고 생각을 해본적은 있지만 이런 경우일거라곤 생각못했다.
다른 사람들도 죽으면 이렇게 되는 걸까.

'뭔가 물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

생각해보니 지금 난 물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뭔가 포근하고 따뜻한 것이 생각못했지만 물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편안해....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인걸.'

눈을 감고 몸에 힘을 뺀채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공간이 요동쳤다.

'....?!'

당황해서 눈을 떴지만 공간은 여전히 암흑이였다.

'아 맞다....'

대체 무슨일인가하고 긴장한채 있으니 갑자기 몸이 끌려나갔다.
마치 거센 물살에 몸이 떠내려가는 것처럼.

'어어....?!'

그리고 어느 순간, 환한 빛이 따갑게 내 눈을 비추었다.
지금보면 난 눈을 떴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감고 있었나보다.
처음으로 느껴지는 나의 몸.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를 받쳐주는 따뜻한 손길들.

'아...이게 천국인가?'

뭔가 새로운 경험이였다.
천사의 손길이 바로 이런걸까. 뭔가 신을 믿는 이유를 알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니 뭔가 소란스러웠다.

"~~~~~~~!"

"~~~!"

"~~~~~~!"

뭐지하고 가만히 있었는데 갑자기 몸이 거꾸로 솟았다.
놀란 나를 무시하고 갑자기 따뜻한 손들중 하나가 내 등 부분을 좀 아프게 치기 시작했다.
아뉘 천사님. 갑자기 치는게 어딨어요?! 엉?!
그리고 내 숨이 막혀왔다.

'응?!'

숨을 쉬려 했지만 뭔가 쉬어지지 않았다.
뭐랄까, 몸과 생각이 따로 노는 느낌?

'아, 위험해...죽겠다...'

천국에서 죽으면 어떻게 되지. 지옥가려나?
이런 생각을 막 할 무렵, 갑자기 두드리던 손길이 멈췄다.

'엇, 무슨...억!'

순간, 아까보다 비교도 안될정도로 강한 터치가 나의 등을 강타했다.
내 몸이 반사적으로 한건지 아님 내 진짜 비명인건지는 모르겠지만....
악!하고 소리가 나왔다.

"응애!"

응? 잠시만...뭐?

"~~~~!"

"~~~~."

그리고 내가 비명을 내자마자 주위에서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뭔가 뉘앙스로 봐서는 안도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방금의 터치로 완전히 자각했다.
난 아기로 태어난 것이였다!

얼마 뒤, 내 몸은 부드러운 천에 쌓여 누군가의 옆에 놓였다.
아마 나를 낳은 어머니겠지.
그나저나 내가 아기로 태어났다니... 설마하던 이세계 전생?
아니, 아직은 속단하기 일러!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아직 눈이 안 뜨여지기도 했고.
그것보다 나 완전 위험했잖아...아기로 태어났는데 바로 죽을 뻔했네...

"~~~~~...."

그리고 내 옆의 누군가가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뭔가 기분이 좋아 몸이 나른해졌다.
무엇보다 아기가 됬다는걸 자각한 것 때문인지 금세 졸음이 몰려왔다.

'....한숨잘까~'

나는 졸음을 거부하지 않았고 금세 잠이 들었다.
잘자요, 내 엄마.

"린 아가씨! 뛰시면 위험합니다!"

안절부절하며 날 쫓고 있는 늙은 집사. 그는 이 자작가의 나의 전속 집사 알프레드다.
내가 태어난 곳은 자작가였고, 부모님들은 날 매우 아껴주셨다.
그리고 나에게 알프레드를 전속집사로 붙여주셨다.
얼굴에 흉터가 나있는 것이 역전노장의 분위기를 풍기지만 나에게는 그저 자상한 할아버지였다.

"괜찮아! 안 넘어져!"

현재 나와 알프레드는 가죽갑옷과 검 한자루를 차고 무장하고 있었다.
그래봤자 경장이지만 적어도 알프레드 덕에 뭔가 있어보이는 모험가처럼 보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거기선 조심하셔야 합니다! 꼭입니다!"

"응, 알았다니까?"

현재 나는 노예를 사러 노예시장으로 가는 도중이였다.
어머니가 저택 사병과 하인이 있는데 왜 굳이 노예를 구하려고 하느냐고 묻자 난 내 호위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결국 어머니가 허락하셨지만 또 문제가 생겨버렸다. 호위를 동하라고 하는 것.
아버지와 어머니가 호위를 대동하라고 했지만 그러면 너무 불편하기도 하고 또 눈에 띄니까 싫다고 했다.
결국 알프레드라도 데리고 가라고 해서 데려왔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잘한 것 같다.
별로 생각 안해봤는데 난 여자였다. 이런 작은 여자애가 혼자 나돌아다니면 납치당하기 딱 좋을테니까 말이다.
이렇게 보면 이제 막 모험가가 되려는 딸과 능숙한 할아버지로 보일 것이다.

"아아....귀족인 아가씨가 이런 차림을...."

"뭐 어때? 이런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왜 지금 노예를 사러가느냐. 설명하자면 내가 태어났을 때로 올라간다.
막 태어난 나는 평범한 아기처럼 먹고, 자고, 싸다가 눈을 뜨고, 걷고, 말하기를 거쳤다.
그리고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충격을 먹었다.

'아니, 막 한국어 패치같은거 없습니까?'

막 판타지 소설을 보면 이런 이세계에 왔을 때 언어패치는 기본으로 해줬는데 여긴 아니였다.
그래서 배우는데 고생을 했다. 뭐 외국어 배우는 느낌으로 했지만.
그리고 또 놀란 것.

여기가 게임속 세상이였다는 것이다.
바로 마왕과 싸워 세상을 구하는 판타지 게임.
로드 오브 판타지. 작명센스가 구리지만 이름과는 다르게 매우 인기를 끈 게임이였다.
1인용게임이라 상대방과 경쟁할 필요도 없고 자기 입맛에 편하게 육성하고 키우는 재미.
높은 자유도와 높은 그래픽, 감명깊은 시나리오가 로드 오브 판타지의 인기를 매우 크게 올려주었다.
그리고 나는 왠지 모르게 이 게임의 내용을 다 알고 있었다.

'나도 어지간한 게임폐인이었네.'

문제는, 바로 내가 태어난 시점이 본 시나리오의 전 단계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직 본 시나리오는 시작도 안했다!
시나리오였으면 여러가지 사업도 해서 돈도 벌고 위기도 피할 수 있겠지만 무용지물이 되었다.

또 한가지, 원래 시나리오는 이러하다.

간략하게 이야기하자면 자작가에서 자작이 사망했는데 그의 딸이 자작에 올랐고, 그 딸은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려다 처형당했다.
하필 그게 전쟁 중인 시기라 피해도 더 컸는데, 자작의 딸은 사망했지만 그녀의 여파는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제 주인공이 등장하고, 세상이 혼란해진 틈을 타 마왕이 침공, 주인공은 성장해서 마왕을 물리친다는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그 자작가는 이곳이였으며 난 그 자작가의 딸이였다.
내가 전생했더니 파멸할 여자였습니다 이런 류의 소설을 보긴 했지만 막상 내가 그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니 좀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난 당연히 살길을 모색했다. 그야 당연히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 어디있겠어?
다행인것은 아버지가 죽은 시점이 그 딸이 흐콰한 시점이였다.
아마 딸의 적접적인 의지가 아니고, 무슨 사고였거나 누가 배신을 한 것이거나 외적인 요소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저택에 사는 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줘서 나중에도 배신할 수 없게 만들고, 또 날 지켜줄 방패를 구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향하는 곳이 바로 노예시장.
바로 게임 속에서 악역(딸)이였던 나와 싸우던 사람들 중 강력했던 자들.
그중 3명이 이곳에 있다. 원래 노예였다가 어느집에 같이 팔려가게 되면서 만나게 되고, 의기투합하여 강해졌다고 한다.
그들은 나중에 주인공에서 강력한 기술이나 조언을 해주는 중요한 사람들이 된다.
그리고 난 그들을 나의 방패로 삼을 생각이다.

"자, 아가씨, 이제 제 뒤로."

슬슬 노예시장이 다 와가자 알프레드가 날 살짝 막으며 앞으로 이동했다.
노예시장에 들어가자 나는 생각외의 광경에 살짝 놀랐다.

"생각보다 깨끗해..."

막 소설 같은데에서는 노예시장이 더럽고, 거적때기나 알몸인 노예들, 험상궃은 직원 등 평범한 것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이곳은 달랐다.

"어서오세요 손님! 두분이십니까?"

잘생기진 않았지만 험상궃지도 않은 일반 사람이 직원이고,

"이쪽으로 이동하시죠."

노예가 철장에 갖혀 있는 모습도 안보이고,

"화장실을 가실 때에는 저쪽입니다."

깨끗하다.

"알프레드, 알프레드. 여기 노예시장 맞아요?"

내가 신기한 눈으로 여기저기 둘러보며 알프레드에게 물으니 알프레드가 인자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는 높으신 분들도 오는 장소라서요. 더러우면 보기도 안 좋고, 평가도 떨어지니 잘 관리 하는 것입니다.
다른 곳들도 여기보다는 질이 떨어지지만 비슷할겁니다."

직원은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나와 알프레드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안쪽으로 이동하니 여러 사람들이 보였다.
좀 귀족처럼 보이는 사람과 용병같이 보이는 사람들 등등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

자리에 앉아있자 곧이어 직원이 약간의 다과와 두터운 서류를 가져왔다.
노예시장의 모든 노예들이 적혀있는 서류라 양이 많은 것 같았다.

'아, 애들위주로 골라달라고 하는걸 까먹었다....'

현재시점이면 본 시나리오까지 10년에서 20년 사이일테고 그럼 그 셋은 아직 아이일 것인데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저기서 그 셋을 찾을 생각을 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노예목록은 여기서 보시면 됩니다. 가격을 큰 토대로 해서 나이, 성별을 세세하게 나누었으니 편하게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노예를 실제로 보시려면 저기있는 직원에게 물으시면 됩니다."

직원의 손가락을 따라가 가리킨 문 앞에 서있는 직원을 보니 그 직원은 평범한 직원들과 다르게 힘쓰는 직원으로 보였다.
아무래도 평범한 자들로만 구성되면 진상부리는 손님을 제압하기 힘들어서 그런걸거라고 생각했다.
난 직원에 대한 관심을 없애고 노예목록을 뒤적였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십니까?"

물론 있고말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명. 이 3명만 있으면 앞으로 내 신변에는 문제가 없다.
물론 이 아이들이 크고 난 뒤의 일이지만... 일단 이 아이들을 찾는데 전념하자.

"앗, 찾았다."

"찾으셨습니까?"

"잠깐만, 2명만 더 찾고."

"알겠습니다."

다행히 3명까지는 허용범위였나보다. 난 그 서류를 빼놓고 다른 아이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다행히 그 셋이 앞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효, 초락기다제~."

"예? 뭐라 하셨습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야, 다 찾았어 가자."

기분이 좋아 무심코 중얼거린건데, 다행히 듣지 못했나보다.
나와 알프레드는 아까 직원이 알려준데로 문 앞에 서있는 직원에게 서류를 보여주며 물었다.
그러자 직원은 둥근 구슬을 들고 뭐라뭐라하더니 이내 다른 직원이 왔다.
다른 직원은 문 안쪽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갇혀있네..."

"아무래도 도망치면 곤란하니까요."

그래도 갇혀있는 노예들은 거적떼기라도 걸치고 있었다.
내가 상상하던 노예에 대한 대우보다는 나았다.

"찾으시는 아이입니다."

아이가 있는 곳에 도착하자 난 그 아이를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좀 지저분했지만 황금같은 금발에 아이인데도 고운 얼굴, 여린 몸.
3명 중 한 명, 미래의 검성을 난 찾을 수 있었다.
분명 이름이...

"알데하이트."

내 부름에 알데하이트는 고개를 들었다.
알데하이트의 눈에는 게임에서 곧고 힘찬 눈동자와 달리 지금은 슬픔만 가득한 눈동자였다.

"...즐거워야 할 나이에 슬픔만 가득차있네."

알데하이트는 게임에서는 몰락귀족 출신이였다.
부모를 잃고 노예로 팔려가게 된 불쌍한 아이.

"내가 앞으로 기쁨을 채워줄게. 같이 가자."

직원은 눈치가 빨랐다. 그래서 곧바로 다른 부하들을 시켜 아이를 데려갔다.

"준비 해놓겠습니다."

알데하이트가 가는 걸 잠시 바라본 뒤 난 다른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이번에도 변함없이 알 수 있었다.

"핀."

내가 이름을 부르자 마자 격렬하게 환영해주는 핀.
실제로는 순식간에 달려나와 창살을 붙잡은 채 우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난 아무것도 안했는데 왜 그러니, 흑흑. 무섭다, 얘.

"데려갈게요."

"안됩니다, 아가...린! 너무 위험해!"

내 말에 알프레드는 깜짝 놀라 날 말렸다.
얘가 위험하다고? 엄...눈빛으로는 좀 위험하긴 한데, 어린애가 위험해 봤자...

"할아버지가 지켜주면 되지?"

내가 해맑게 웃으며 알프레드를 바라보았다.
내 비장의 무기 13번. 아이의 미소를 악용한다! 후후후...이걸 맞고 버틸 수나 있을까?!
그리고 알프레드는 내 웃음에 함락되었다.

"이거 놔! 놓으라고!"

감옥에서 나가는 와중에도 핀은 몸부림을 치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나는 조용히 핀을 관찰했다. 미래의 용병왕, 화전민 출신. 태어났을 때부터 싸움에 특화된 몸.
그가 무기를 잡고 휘두르면 몇십의 병사가 쓰러진다고 하였다.

"마지막이니까 얼른 가요!"

고민이 많은 알프레드를 재촉하며 난 마지막 장소로 자리를 옮겼다. 거참, 괜찮다니깐.

"지니, 드디어 찾았다."

마지막 나의 방패.
미래의 대마법사 지니. 막대한 마력량과 훌륭한 마법실력으로 마법계에 크나큰 공헌을 하게된다.
감정없이 나를 바라보는 눈. 그는 사람을 관찰하는데 매우 뛰어나다.
지금도 나를 보며 관찰하고 있겠지.
뒤가 켕기는 사람이나 까만 속내를 지닌 사람이라면 좀 껄끄럽겠지만 난 그쪽도 아니고, 여기선 쿨하게.

"같이 가자!"

아이의 미소를 악용한다!
이것은 아이의 미소와 아직 지니가 어리다는 것을 이용한 완벽한 작전!

"......"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냐, 속으로는 이런저런 생각하고 있을거야.

"이것으로 마지막이십니까?"

"네."

"그럼 잠시 저쪽으로 가셔서 대기해주시면 됩니다."

지니가 감옥에서 나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에는 이미 알데하이트와 핀이 있었다.
핀은 계속 날뛰었는지 구속구를 착용한 상태였고, 아직도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쟤 성격좀 고쳐야겠다....'

이윽고 지니가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직원은 나에게 노예각인을 할 것이냐고 물었고, 나는 3명을 둘러보고 말했다.
사실 이미 정해져 있기도 하다.

"쟤만 해주세요."

"야! 잠깐 왜 나만 해! 야-읍!읍!읍!"

핀은 자신만 각인을 했다는 사실에 짜증을 냈다가 입을 구속구로 막혔다.
나머지 둘은 좀 의아한 시선이였지만 이정도는 예상했기에 난 핀의 각인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각인이라고 해봤자 덤비거나 시끄럽게 할때 막는 용도로 할거라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그럼 시작합니다."

각인이 시작되자 핀이 더 심하게 발버둥쳤다.
다행히도 힘쎈 직원이 있었기에 몸부림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각인을 마치자 직원은 구속구를 풀어주었고, 당연하게도 달려드는 핀을 난 간단하게 제압했다.

"야! 니가 뭔데-"

"무릎꿇고 앉아."

"으악!"

"입 닫고."

"읍읍!"

죽일 듯이 날 바라보는 핀을 보고 난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여기 잠시만 있다갈게요."

직원도 내가 하려는 걸 눈치챈건지 순순히 나갔고, 난 알프레드에게도 축객령을 내렸다.

"아가씨, 하지만-."

"괜찮아, 이 둘은 가만히 있고, 이 애는 각인을 새겼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알프레드."

내가 잠시 알프레드를 바라보자 알프레드는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난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3명을 바라보았다.

"모두 안녕. 난 아그네스 가의 장녀, 린 아그네스 리그렛이야."

내가 자기소개를 했지만 대기실에는 핀이 읍읍 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 침묵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나저나 넌 안지치니?!

"이제 1대1 면담을 해볼까~."

난 천천히 지니 앞으로 가 지니를 바라보았다.

"안녕!"

"...왜 제가 먼저 입니까."

"여기서 가장 네가 똑똑하니까."

간단한 이유였다. 여기서 가장 말이 통하는 사람은 현재 지니였다.
그리고 설득하기도 가장 쉬웠다.

"난 네가 필요하고, 너도 날 필요로 해. 아니, 필요로 할거야."

내 말에 지니는 눈을 찌푸렸다. 지니의 속마음은 모른다.
그러니까 속삭인다.

"복수하게 해줄게. 넌 힘이 필요하잖아?"

달콤한 악마의 유혹을.

"....뭘 원합니까."

"음, 역시 이야기가 빨라서 좋아. 내용은 날 지키는 것, 기한은... 12살쯤?"

"3년..."

"그 뒤로는 어떻게 하든 좋아, 날 떠나던 계속 남아있던 너의 자유야."

난 마지막 결정타로 다시 한번 말했다.

"그동안 난 너에게 힘을 줄거고, 넌 그냥 날 지키기만 하면 되고, 쉽지?"

뭐 악마의 속삭임이라고 과장하기는 했지만 그냥 계약하자는 거다.
딱히 속이는 것도 없고, 지니에게 한참이나 이득이다.
그리고 지니는 이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지니를 소파에 앉게 한 후 나는 핀에게 다가갔다.
핀은 아직도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어머, 미안해라. 실수로 잊고 있었네. 다리를 풀어도 좋아."

내가 말하자 핀은 다리를 풀더니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미안, 다리 저린거는 생각못했어.

"입을 다물라는 명령을 해제 할건데, 잘 들어. 또 소리 지르면 다시 입 닫게 할거야. 알았어?"

내 말에 핀은 나를 노려보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내가 뭘 잘못 했길래 그러는거야, 정말.

"말해도 돼."

"푸하-!"

명령을 해제하자 핀은 그제야 답답한게 사라졌다는 듯 숨을 크게 내쉬었다.
자 그럼 궁금한 것 하나.

"왜 날 보고 죽일 듯이 달려들어?"

"왜긴! 귀족은 다 나쁜거야! 엄마도 아빠도 귀족이 나쁜 거랬어!"

"아이고..."

즉, 핀의 머릿속에는 귀족=나쁜놈이라는 공식이 박아져있나보다.
이것 참...

"귀족이면 다 나쁘다는 생각은 버려."

"아니거든! 애초에 엄마도 아빠도 귀족 때문에 나와 헤어진거라고! 그러니까 나쁜거야!"

"누가 그래?"

"어...아무튼! 네가 나쁜거야!"

"보기라도 했어?"

"......"

아아, 이놈 지금 버림받은 걸 외면하고 있구나.
엄마와 아빠에게 버림받은걸 인정하기 싫어서 그게 무서워서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귀를 막고.
너도 참 불쌍한 인생이구나. 하지만,

"인정해."

"뭘!"

"너는 버려진거야. 엄마와 아빠에게."

".....!"

"이제 넌 인정해야 해."

"아냐....아니라고!"

"그래서 아니라고 해봤자 현실이 달라져? 넌 너조차 지킬 힘도 없는 어린애야.
니가 아니라고 해봤자 아무도 믿지도, 관심을 가져주지도 않아."

"닥쳐, 네가 뭘안다고!"

"응, 난 너에 대해 몰라. 그러니까 지금의 너를 보고만 말하는거야."

"....이익!"

"엄마와 아빠가 보고싶지?"

".....그래서 뭐! 니가 만나게라도 해줄거야?"

만나게 해줄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걸 말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자신이 약하다는걸 알리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경계하는 새끼 호랑이를 달래줘야 할 시간이다.
난 살며시 핀을 안아주었다.

"....뭐...뭐야...!"

핀도 당황했는지 금방 날 밀쳐내려고 했다.
하지만 내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외로웠지?"

"....!"

"무서웠지? 누군가 위로해 주길 바랬지?"

내가 생각해도 내가 참 무섭다. 거리낌없이 이런 행동도 다하고.
하지만 이것은 효과적이였다. 핀의 몸이 살짝 떨린 것을 난 느낄 수 있었다.

"걱정 마, 이제 넌 상처입지 않아. 외롭지도 않아, 내가 곁에 있어줄게. 위로해줄게."

핀의 몸이 계속 떨리기 시작했다.
모든 걸 경계하는 새끼 호랑이는 바로 다가가면 안된다.
살며시 이렇게 보듬어줘야 마음을 열어준다. 지금의 핀처럼.

"엄마 아빠가 보고 싶지?"

"흐...으으으....엄마....아빠...."

그리고 핀에게서 서러움의 감정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핀을 다독여 주었다. 괜찮아, 괜찮아 라고 말하면서.
한동안 실컷 운 핀은 잠들었고, 난 살며시 바닥에 눕혀놓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낯간지러운 말을 잘도 하시네요."

"뭐래니!"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던 지니가 말하자 괜시리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난 알데하이드에게 갔다. 마지막 최대의 난관, 알데하이드.
나머지는 말이라도 통했는데 이 아이는 아니다.
몰락 귀족으로 부모가 눈 앞에서 죽고 그대로 노예로 팔려나왔다.
그리고 세상에 절망했다. 9살짜리 꼬마애가 그런 경험을 했으면 당연하기도 하다.
이런 애는 강렬한 기억을 심어줘서 한 사람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하고 그다음 주위를 둘러보게 해야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말하는 것 밖에 없다.

"좀 도와드릴까요."

"정말?!"

내가 순식간에 눈을 반짝이며 지니를 돌아보자 지니가 윽 하는 소리를 냈다.
너무 태세전환이 빨랐나?

"마법으로 꿈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오오! 마법! 말로만 듣던걸 지금 듣게 될줄이야!

"그보다... 마법 할 줄 알아?"

"어릴 때 조금."

허어...이놈 물건이잖아?! 그럼 아까 관찰안의 인식도 바꿔야 할것 같은데.
일단은 알데하이드가 먼저다.

"그럼 부탁해볼까?"

"그럼 이 애의 이마에 손을 짚으세요."

"몇가지 부탁을 해도 될까?"

"네."

지금은 이 아이를 속이더라도, 이 슬픔에서 구해주고 싶다.
그리고 눈을 감자 내 의식은 점점 흐려졌다.

"형! 무슨 일 있어?"

"....미안해, 알데하이드."

평범한 나날, 그날은 모두가 좀 달랐다.
분주한 하인들, 눈물을 흘리시는 아버지와 어머니, 나에게 사과하는 형.
나만 아무것도 몰랐다. 나만 혼자 덩그러니 다른 세상에 던져진 것 같았다.

"영주님, 도련님이...."

"아아아.....!"

집사 아저씨가 가져온 편지를 읽고 울음을 떠뜨리는 부모님을 보았다.
난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했다.

"알데하이트, 너라도 도망치거라!"

부모님에게서 도망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미안하다, 알데하이트. 이 아비는 널 사랑했단다."

부모님이 눈 앞에서 죽었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

이런 생각을 몇번이나 한걸까, 몇 번이고 똑같이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 아버지에게 손을 뻗어본다.
그리고 변함없이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누구..."

그 누군가를 바라보자 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쁜 아이...'

저녁의 검은 하늘처럼 까만 머리카락, 보석처럼 빛나는 어두운 눈동자, 흰색의 하늘거리는 옷.
순간 천사라고 생각했다.

"누구세요....? 혹시 천사에요?"

천사님은 가만히 나를 껴안아 주셨다.
그리고 나에게 속삭이셨다.

"알데하이트, 이건 꿈이란다."

"꿈이요...?"

"응, 하룻밤이면 사라질 꿈."

"그럼 엄마도....아빠도 살아있어요?"

".......응."

천사님의 대답을 듣자마자 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다행이다....다행이다.....다행이다....

"넌 그저 소꿉친구의 집에 놀러왔을 뿐이야.
그 외에는 아무일도, 아무일도 없었어."

"......네"

난 감았던 눈을 살며시 떴다.
알데하이트는 눈을 감은채 가만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뭘 하신 겁니까?"

"거짓말을 조금."

"어째서?"

"적어도 이 애에게는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해."

이 아이는 핀처럼 회복력이 빠르지 않다.
마음이 여리고, 약한 아이이다. 적어도 지금 속이더라도 마음을 강하게 만들 준비를 해야한다.
지니는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내 기억에 의하면 꿈 속의 내용은 술자에게도 들어간다고 한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인걸 알고, 또 내가 그 아이를 속인 걸 알았을텐데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난 무릎을 짚고 일어나 알프레드를 불렀다.

"이제 가자. 집으로."

집으로 돌아가자 알프레드는 3명에게 안내를 하고 오겠다며 3명을 데리고 사라졌다.
나는 방에 들어가 침대에 풀썩 누워 3명을 기다리며 생각했다.
원래는 저 셋이 우연히 같은 귀족에게 팔려가게 된다.
그리고 마차에서 서로 대화하며 알아가는데 여기서 어떻게 한건지는 몰라도 알데하이트가 마음을 연다.
그리고 귀족이 산을 통과하던 도중 산적에게 죽자 즉시 도망친다.
하지만 내가 거둬왔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다.

'지쳤다아~'

애들 2명을 달래는 건 힘든 일이야.
뭐, 나도 애지만. 적어도 앞으로의 일이 기대가 됬다.

'파멸을 피하기 위한 준비 1단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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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5-12 22:51 | 조회 : 1,695 목록
작가의 말
Deemo:Hans

한미모의 성진씌 깜짝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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