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기회

37. 기회

하준씨가 손목밴드에 대해 질문을 하고 나서부터 어색하기 시작했다. 서로 아무런 말 없이 오로지 감자만 심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준씨 먼저 씻으러 욕실로 들어가자마자 동생이 나에게 찾아와 귓속말한다.

"아침까지만 해도 사이 좋더만..! 지금은 왜 그래?"
"뭐가. 지금도 사이좋은데."
"서로 눈을 안 마주치잖아. 아니지, 오빠가 저 남자 피하고 있잖아.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어라, 오빠? 오빠!"

동생의 말을 무시한 채 내 방으로 들어와 흙이 묻어있는 채로 침대에 누워 별 무드등을 켰다. 아직 낮이라 별이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안 보여."

결국 창문에 걸려있던 커튼을 쳐 햇빛을 막자 그제야 밝은 별들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하아."

이제 하준씨가 날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다. 하준씨는 나와 다시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난 흙이 묻어 더러워진 하얀 손목밴드를 벗어 상처를 바라봤다. 여전히 상처를 보면 죽은 아키라가 떠올라 눈을 감았다.

"...괜히 봤어."

다시 손목밴드를 착용하고 시간이 지나 꺼져버린 별 무드등을 다시 켜고 천장을 올려다본다. 잠시 뒤, 노크 소리와 함께 다 씻었다는 하준씨의 말이 들리고 문이 열렸다.

"들어오란 말은 안 했는데."
"멋대로 들어와서 미안. 할 얘기가 있어서."
"난 없으니까 나가요."
"내가 있어."

나가라는 내 말에 하준씨는 문을 닫고 나에게 한걸음씩 다가올수록 나는 하준씨와 가까이 있지 않으려고 뒷걸음질하며 도망쳤다. 결국 침대에 걸려 누워버렸다. 하준씨는 도망치지 못하도록 날 가둔다.

"뭐하는 짓.. 하아 됐고 지금 당장 비켜요."
"날 계속 밀어내지마. 조금만 손을 뻗으면 잡힐 거 같은데.. 그럴때마다 자꾸 멀어져가. 열심히 가고 있는데 넌.. 왜.."

하준씨의 눈이 슬픔에 잠겼다. 그의 슬픔에 잠긴 눈을 보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이 쓰다듬었다. 하준씨는 쓰다듬고 있는 내 손을 소중하다는 듯 부드럽게 잡고 눈을 감는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요."
"상처줘서... 널 민혁이라 생각해서. 그래서 상처줘서."
"...알긴 아네."
"그래서.. 진짜 염치 없는 거 아는데."

하준씨는 눈을 뜨고 나와 눈을 마주친다. 오랜만에 드는 간지러운 감정에 눈을 피해버렸다.

"나에게 기회를 줘."
"무슨 기회요?"
"네가 날 다시 좋아하게 만들 기회."
"....."
"이제 씻으러 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하준씨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나에게서 멀어졌다. 멀어져 가는 하준씨의 뒷모습에 지금 붙지 않으면 영영 놓칠거라 생각하게 된 나는 황급히 그의 옷 소매를 잡아 그가 더이상 앞으로 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실 난 아직도 하준씨를 좋아한다. 여전히 그의 행동이, 사소한 행동들이 날 떨리게 만들었고 날 웃게 만든다. 지금 당장 그를 안아 사랑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용서할 생각은 없어.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만 괴롭히고 싶어졌다.

생각하고 있는 바람에 내가 아무런 말을 하고 있지 않자 하준씨는 불안했는지 목소리가 떨린채로 내 이름을 조심히 부른다.

"은우야?"
"마지막."
"어?"
"마지막이라고요. 내가 당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 기회 줄 동안 내가 넘어가지 않으면 하준씨도 나 포기하는걸로."

내 말에 하준씨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고 날 끌어 안는다. 그런 행동이 귀여워 그의 가슴 품에서 웃음을 숨기고 그를 살짝 밀쳤다.

"난 갑작스러운 스킨십 싫어한다는거 알아둬요."

난 조금만, 아주 조금 하준씨를 괴롭힐 생각에 저런 말이 나왔다. 저런 말을 나에게서 처음으로 들은 하준씨는 고개를 다시 연신 끄덕이곤 귀여운 말을 한다.

"응. 그럼 허락 받고 할게. 안아도 되?"
"....좋아요. 처음이니까."

내가 조심히 두 팔을 벌리자 기다렸다는 듯 내 품안으로 파고 들어온다. 어린아이마냥 파고 들어온 하준씨의 자연스레 손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겨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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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 신고 2019-01-21 14:54 | 조회 : 2,281 목록
작가의 말
하얀 손바닥

짠! 오늘은 두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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